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陶山書院

안동시청에서 국도 35호선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눈을 돌려 꼬불꼬불한 국도를 따라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를 거쳐 산림과학박물관을 지나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도산은 선비정신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효의 대부인 ‘강호문학’의 대가인 농암 이현보 선생을 비롯, 근대사에는 향산 이만도, 육사 이원록 선생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배출시킨 곳으로 특히 토계리 하계마을 한 부락에서 문과급제 15명과 독립운동가 25명이 탄생한 곳이다. 도산이 타지역과 차별화되고 있는 것은 올곧은 안동선비정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과거를 포기하고 학자의 길로 일관한 ‘안동처사’의 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된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에서 출발했다. 도산서당은 선생의 나이 61세(1561년)에 지은 것으로 1557년에 착공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서원의 총 영역은 324,945㎡이다. 도산서원이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것은 퇴계 선생께서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도 있지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정조 16년 규장각 각신 이만수 선생을 시켜 상덕사 알묘시 치제문에서 ‘추로(趨魯)’라 처음 칭한 곳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어명에 의해 별시 즉, 특별과거 시험을 전국에서 처음 이곳 사사단(試士檀)에서 치루어졌다는 점이고, 2002년 7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설립되어 전국 서원 중 최초로 여성들에게 굳게 닫혔던 사당참배를 서원 건립 후 428년 만에 허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원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561년(명종16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학문과 인격을 닦았는데, 사후 4년 만인 1574년(선조7년) 문인과 유림의 발의에 의해 서당이 있던 자리 위쪽에 서원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奉安)했다. 1575년(선조8년)에 사액되어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편액을 임금이 하사하였으며, 1615년(광해군7년)에 이르러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하였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향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는 행사로 민간차원에서 최고, 최대의 전통 향사례로서 매년 봄·가을 서원에 있는 상덕사에서 봉행된다. 유교의 가치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참례도 허용하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은 1501년(연산군7년)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1570년(선조3년)에 돌아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주요저서로 《계몽전의》《성학십도》《주자서절요》《심경후론》《예안향약》《자성록》등이 있으며, 1970년 정부에서 서원을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 했다.

◇구조
도산서원은 1561년(명종16년)에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과 농운정사를 지어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후 제자들이 퇴계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고 ,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1575년(선조8년)에 완공을 하고 석봉(石峰) 한호가 쓴 현판을 나라로부터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1969∼1970년 사이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 서원영역 전체가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210호, 상덕사 정문 및 사주토병은 보물 211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서원은 낙동강변에서 곡구암(谷口巖)을 끼고 들어서면 영지산(靈芝山)을 등지고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지대가 높아지고, 남북으로 길게 축을 형성하면서 좌우에 건물들을 앉혔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도산서당, 조차측으로 농운정사가 나오고 농운정사 바로 뒤에 하고직사가 있다. 중앙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진도문을 마주하는데 그 좌우에 광명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인 홍의재(弘毅齋)와 박약제(博約齋)가 좌우에 있고, 정면으로 전교당이 자리하고 있다. 강당영역 좌측에는 상고직사, 우측에는 정판각이 위치한다. 전교당의 뒤쪽 좌측 계단을 오르면 진사청이 나오고, 우측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가장 상위 영역인 사당공간에 진입하게 된다. 건물의 좌향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비슷한 방향을 보고 앉아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서 만나는 공간의 구성이 건물들의 성격에 맞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당
퇴계 선생과 제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의 위패를 함께 모신 사당으로 서원 경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당영역은 강당 건물 보다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앉아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 형식으로 3칸이며, 상덕사(尙德祠) 현판이 붙어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강당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1574년(선조7년)에 건립된 대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서쪽의 한 칸만 통칸으로 온돌방을 만들고 나머지는 마루로 꾸몄다. 도산서원의 사액현판이 게시되어 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방은 서쪽으로 쪽마루를 연결하고 후면으로는 벽장을 두었는데, 이 방은 원장이 거처하던 곳으로 한존재(閑存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루방은 전면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동쪽 측면과 후면으로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건물의 전면 서쪽에 정료대가 서 있다.

◇도산서당
도산서당(陶山書堂)은 3칸 크기의 건물로 좌측부터 골방이 딸린 부엌, 완락재(玩樂齋)라고 이름 붙은 온돌방, 암서헌(巖棲軒) 현판이 걸린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맞배로 꾸몄는데, 우측에 평상모양의 툇마루를 연결하면서 지붕을 이어 붙인 것이 특이하다. 마루에서 보면 앞쪽으로 연당을 조성하여 주변에 식재를 하고 연당과 맞닿은 담장은 개방하여 외부 자연경관과의 연결을 통해 대청에서의 느낌을 극대화하였다. 연당의 이름은 정우당(淨友塘)이다. 대청에서 방으로의 출입문도 다른 집에서는 보기 힘든 모양으로 삼분합 들어열개문을 만들었는데, 중앙의 것만 창호지를 바른 세살문으로 나머지는 판문으로 되어있다.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은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을 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암서헌이라 했다.

◇광명실
진도문으로 들어서기 전 좌우에 동서 광명실(光明室)이 위치해 있는데, 지형에 따라 누각 형식으로 세워진 장서고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사방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지붕은 맞배로 했으며, 단청을 하고 하부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광명실은 임금이 하사한 서적과 퇴계 선생이 보던 서적, 제자들의 문집을 모아 놓은 건물이 있다. 동광명실은 1819년 (순조19년)에 지었고, 서광명실은 1930년에 동광명실과 같은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동재·서재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로 지어진 집이다.
강당의 전면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였다. 앞의 반 칸은 툇마루로 꾸미고 방은 2칸과 1칸으로 나누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고 이름 지었다.

◇농운정사
1561년에 지은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기숙사로 퇴계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工자형 평면으로 짓도록 했다. 건물에는 관란헌(觀瀾軒), 시습재(時習齋), 지숙요(止宿療)의 현판들이 붙어 있는데, 서남쪽의 관란헌은 휴식공간, 시습재는 학습공간, 지숙요는 기거공간으로 사용했다. 건물의 평면이 매우 특이하며, 문과 창호도 기능과 모양을 고려하여 매우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고직사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로 나누어져 있다. 상고직사는 강당영역의 서쪽에 하고직사는 서광명실 아래에 위치한다. 상고직사는 ㅁ자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고 아래로 부엌과 고방들이 이어져 가운데 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하고직사는 ㄷ자형 평면으로 2칸의 대청 좌우에 방을 연결하고 아래에 부엌을 두었으며, 전면이 개방된 형식이다.

◇장판각·전사청·역락서재
강당의 동쪽에 문집 책판이 보관되어 있는 장판각이 있는데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가운데칸의 출입문만 쌍여닫이 세살문으로 하고 좌우에는 판문을 달았다. 장판각은 서원에서 찍어낸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로 선조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었다가 2003년 5월 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사당의 서남쪽에는 진사청을 두었는데, 향사를 지낼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으로 2동의 건물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쪽은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로, 서쪽은 주청(酒廳)으로 사용되었다. 각각의 건물이 한 칸은 마루로, 한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서쪽의 건물은 마루 대신 전돌로 꾸며져 있다.
역락서재는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을 비롯한 뜻 있는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시사단
시사단(試士壇)은 1792년(정조16년)에 정조 임금이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력을 기리고 지방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 지방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경북서원지(개정판)·국학진흥원 편, 도산서원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도서출판 성심·간>


◇도산서원관리사무소 23년차 근무자 김준규 팀장 인터뷰

- 근무하면서 하면서 힘들었던 점
1년 내내 휴일 없이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15명 중 10명이 돌아가면서 하루 2명씩 숙직을 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소실이 되면 복원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원형보존이 어렵다. 시내와 떨어진 외딴 곳에 있기 때문에 산불, 화재, 도난 등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초동대응 시간이 부족하다.
그동안 화재를 여러 차례 예방을 했다. 처음에는 유물전시관 절반을 사무실로 썼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문화재로 지정되면 전기사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후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누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
퇴계 선생 후손들은 1일과 15일 유숙하면서 사당에 모셔두고 추모를 하고 가는데 하루는 오전에 전시관 천장에 전선이 타는 걸 발견하고 즉시 조치했다.
또 한 번은 지금은 안 하지만 과거에는 사극촬영을 허락했다. 스탭들이 야간 촬영 후 모닥불을 피웠다. 불을 끄고 갔는데 마당에 불이 붙어 있었다.
2000년에는 상가 매점 분식점에서 튀김을 하고난 후 가스 불을 안 끄고 나갔다. 12월 31일 저녁을 먹고 7시 30분쯤 불이 나 소방서에 신고해 불을 껐다.
어느 해, 12월 오후 6시 30분께 자동차가 1대 들어왔다. 개방시간이 지나서 못 들어간다고 했더니 욕을 하고 나갔다. 조금 있으니 서원 입구서 불이 나 즉시 소방서에 신고해서 불을 껐다. 화재원인은 담뱃불로 추정됐다.

- 보람 있었던 점
서원을 찾는 사람은 계층이 다양하다. 어린이, 학생, 노인, 학자 등 지식의 고하를 막론하고 관광안내자의 설명에 귀 기울여 줄 때 보람이 있다.
한번은 미국교포 일행이 예약을 하고 찾아왔다. 3시간에 걸쳐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교포 중 한 사람이 대가도 없이 오랜 시간을 설명을 한다며 비웃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이는 사고의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물질문명의 폐해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이 동양사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꼈다.

- 방문객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문화재 관람태도를 보면서 세대 간의 많은 차이를 느낀다. 30년 사이에 문화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2,30대의 젊은 세대 부모들은 개인주의의 극치다. 6,70년대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한옥세대와 8,90년대 풍요한 시대를 살아온 아파트세대의 생각은 천냥지차다.
서원을 우리나라의 정신적인 구심체라는 것을 알고 방문했을 텐데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놀고 어지럽혀도 제지를 하지 않는다. 제지를 하면 문화재법에 담겨있느냐며 따진다.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볼 때면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퇴계 선생이 가장 중요시한 것이 ‘소학’이다. 학문의 기초가 된다. 우리교육에 접목시켜야 한다고 본다. 허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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