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분강서원(汾江書院)

▲ 분강서원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을 지나 봉화를 향해 가다보면 청량산을 지척에 두고 커다란 협곡을 만난다. 여기서 큰 길을 벗어나 협곡을 향해 들어가면 강 건너 절벽아래 그림처럼 정자가 서있고 강을 따라 가느다랗게 찻길이 이어진다. 강물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눈앞이 확 트이며 깜짝 놀랄 광경을 만난다. 넓은 강변을 앞 마당삼아 오래된 기와집이 십여 채 솟아있고 맨 아래쪽에는 강가에 정자 한 채까지 높다랗게 서 있다. 앞으로는 병풍처럼 솟은 절벽과 맑은 강물, 적당한 크기로 조성된 모래사장과 고택을 휘돌아 길게 이어지는 낙동강줄기, 뒤로는 송림이 울창한 야산이 아늑하게 보인다.
여기가 바로 농암종택이다. 본래는 도산서원 앞쪽의 분천(부내)마을에 있었으나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곳곳에 흩어졌다가 2003년부터 종택과 사당, 긍구당을 시작으로 차츰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후 서원과 애일당(愛日堂), 강각(江閣)이 오고 2007년에 분강서원을 마지막으로 분강촌이라 부르는 일대의 고택촌이 완성되었다.
이현보가 정계은퇴 후 농부를 자임하고 일개 서생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으로 추앙받던 곳이 바로 예전의 분천마을. 그 모양에 가장 흡사한 곳을 골라 옮겨온 곳이 바로 지금의 가송리 분강촌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나지막한 담을 두른 마당이 의젓하다. 오른쪽 산 방향으로 높은 기단위에 사랑채가 있고 그 뒤로 보일 듯 말 듯 안채가 자리 잡았다. 사랑채는 넓은 대청마루 옆으로 두 개의 방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방문 앞에 적선(積善)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 현판은 선조임금이 직접 쓴 휘호라고 전해진다.
반대편 강을 향해서는 별채가 소담스럽게 서 있고 그 끝자락에 종택에서 가장 오래된 긍구당(肯構堂)이 의연하게 앉아 있다. 크기는 작지만 종택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바로 긍구당인데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이다. 농암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긍구당이다 보니 문중의 중요한 일들이 모두 이곳에서 결정되었던 중요한 곳이다. 긍구당 누마루에서 내다보는 종택의 풍광이 아주 시원스럽다. 종택의 담장너머에는 오른쪽 선 허리에 명농당이 위세를 뽐내고 있는가 하면 한단 더 뒤로는 분강서원이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농암 이현보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서원 앞을 가로질러 강과 절벽이 만나는 끝단에는 애일당과 강각이 멋진 풍광을 뽐내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서원이다. 1613년(광해군5년)에 사람들의 공의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鄕賢祠)에 위패를 봉안하고, 1700년(숙종26년)에 분수(汾水)가의 애일당(愛日堂) 남쪽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1702년(숙종28년) 10월에 위판을 봉안하고, 유상(遺像)을 묘내(廟內)에 봉안했다.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67년 옛 터 서쪽에 복원하고 영정을 복원하여 석채례(釋菜禮)를 행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도곡재사(道谷齋舍) 옛터에 서원을 이건하였으며, 매년 3월 3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훼철되기 전에는 파산(巴山) 유중엄(柳仲淹)이 함께 배향되었으나, 복설된 뒤에는 이현보만 주향되어 있다.

◇구조

서원은 강당인 흥교당(興敎堂), 동재인 경서재(敬恕齋), 서재인 극복재(克復齋),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고직사, 외삼문, 내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원의 좌측으로 신도비각이 서 있다.
배치의 형식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가 있고 정면으로 강당이 위치하지만 대칭을 이루지는 않는다. 사당은 강당의 우측 뒤에 있으며, 고직사는 강당과 동서재의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넓은 마당으로 인해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사당

사당인 숭덕사는 농암 이현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건물은 단청을 하고 합각면에는 풍혈판을 설치하였다. 사당 내부는 전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통칸이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좌우 측면에 채광을 위해 붙박이장을 설치한 것이 일반적인 사당건물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징이다.

◇강당

강당으로 쓰이는 흥교당(興敎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구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에 정면 1칸씩의 방을 아래위로 두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앞의 방은 마당 쪽으로 두짝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좌측에 딸린 쪽마루에서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내었다. 이 방의 출입을 마루에서 바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뒤의 방은 마루에서 한짝여닫이문으로 출입이 가능하며, 앞의 방과 마찬가지로 좌측의 쪽마루에서도 드나들 수 있다.
마루는 전면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후면과 측면에는 각 칸마다 두짝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다. 마루의 후면에는 쪽마루를 달았고, 뒷방의 후면으로는 벽장이 있어 돌출되어 있다. 마루에서 방들 쪽으로 있는 세 개의 기둥 중 가운데 기둥 위 벽면에 성정재(誠正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집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 중에 마루의 전면 가운데 기둥 2개만 두리기둥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동재

동재에 해당하는 경서재(敬恕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3량가 맞배기와집으로 3개의 방과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방은 한 칸씩으로 아래의 두 개는 전면에 두짝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가장 위쪽의 방은 한짝여닫이문으로 문의 높이도 낮아 입면의 변화를 주고 있다. 툇마루는 집의 길이만큼 전면에 길게 설치가 되고, 아궁이는 윗방 쪽에 두었다.

◇서재

서재에 해당하는 극복재(克復齋)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전면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한 칸 크기의 방들이 2개 나란히 이어지고 현판은 우측방 인방위에 걸었다. 동재에 비해 규모가 작고 전면의 마루도 쪽마루로 되어 있어 동서재가 획일화된 대칭의 평면을 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고직사

서원 경내의 좌측에 위치한 고직사는 안채와 대문채 사이의 넓은 마당 때문에 전체 서원의 규모에 비해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ㄷ자’ 모양으로 평면이 구성된 안채는 정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큰방과 웃방이 이어지고 아래에 부엌이 연결된다. 우측으로는 건넌방과 아궁이가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의 구성은 안동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이고, 완전히 개방된 마당의 형식도 특이하다. 안채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로 앉아 있는 대문간채는 중앙에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과 광들로 꾸며졌다. 강당 옆으로 고직사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나 있다.

◇긍구당·애일당·명농당·비각

긍구당(肯構堂)은 이현보의 고조부이자 예안 입향조인 이헌이 처음 지은 건물로, 이현보의 종택 별당이다. 이현보가 여기서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현보가 87세 되던 해 1553년(명종8년)에 그의 아들 이문량이 이 집을 중수하자 이를 기뻐하며,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다’는 뜻의 당호를 지었다. 1554년(명종9년)에 이현보가 이황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조상이 전한 집이 이 집인데, 고조, 증조 이후 조부와 부까지 전하여 왔네. 중간에 개수도 하고 지금까지 있으니, 가문의 구물(舊物)이네. 지금 개수할 것 같으면 그대도 역시 후손이 되니, 큰 필적을 남기어 두는 것이 선명하게 단청하는 셈이 아닌가?”하여 이황에게 긍구당의 《원석헌연시(元夕獻莚詩)》화답시를 요청하였다.
농암 이현보는 46세인 1512년(중종7년)에 고향집 옆 농암바위 위에 날을 아껴 효도를 하겠다는 뜻의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명절마다 이곳에서 때때옷 차림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다고 한다. 농암의 이런 효행으로 선조가 농암 가문에 적선(積善)이라는 대자(大字)를 하사였고, 경로와 함께 농암종택 5백년 전통을 이어왔다.
명농당은 1501년 농암이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를 그렸다. 종택 사랑마루에는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려 있다. 크기가 무려 1m나 되는데, 선생 아들 매암 이숙량이 왕자사부(王子師傅)의 벼슬을 받아 선조 임금께 나아가 사은숙배하니 임금이 “너의 집은 적선지가(積善之家)가 아니냐”라 하시고 즉석에서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외삼문은 한 칸의 규모로 강당과 동서재가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주출입구이다. 사당영역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3칸 규모의 평대문 형식으로 단청을 하고 각 칸의 문마다 태극을 그려 넣었다.
서원의 좌측에는 신도비를 모시는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신도비는 귀부위에 비신만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농암 이현보(1467년, 세조13년-1555년, 명종9년)

조선시대를 이끌어 온 선비들은 높은 학식과 교양을 겸비했음은 물론이고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용기와 실천하는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벼슬이나 재물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사람들에게 까지 널리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문학 중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어부가’를 지으신 농암 이현보 역시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인이자 진정한 선비였다. 그는 임금 앞에서도 당찬 신하였으며, 민생을 소중히 여긴 자상한 목민관이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극하고 아름다운 효심을 보여준 살가운 자식이며, 출세나 벼슬에 끌려 다니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이자 풍류객이었다.
본관은 영천. 서른둘에 벼슬길로 나아가 사간원 정언, 안동부사·충주목사·대구부윤·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와 호조의 참판 등을 지냈다.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살았다.
농암(聾巖)은 그의 자호(自號)다. 그는 마을 앞에 있는 귀먹바위(이색암(耳塞巖), 즉 농암(聾巖))를 가리켜 "앞강은 상류의 물살과 합류하여 물소리가 서로 향응하여 사람들의 귀를 막으니" 유래한 이름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승진, 좌천에 달관한 은자가 산다면 진실로 어울리어 '농암'이라 하고, 늙은이가 자호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 중에 시름없는 이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창파에 띄워두고
인세(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 알 것인가.

굽어보면 천 길 푸른 물, 돌아보니 만 겹 푸른 산,
열 길 속세의 티끌에 세상사 얼마나 가려져 있는가.
강호에 밝은 달이 밝게 비치니 더욱 무심하구나.

연잎에 밥을 싸고 버들가지에 물고기 꿰어서,
갈대와 억새풀 우거진 곳에 배 대어 묶어 두니,
이러한 자연의 참된 재미를 어느 분이 아실까.

산봉우리 한가로운 구름 일고 물 위엔 갈매기 나네.
아무런 사심 없이 다정한 건 이 둘뿐이로다.
한평생 시름을 잊고 너희와 더불어 지내리라.

서울을 돌아보니 궁궐이 천 리로구나.
고깃배에 누워 있은들 잊은 적이 있으랴.
두어라 내 시름 아니다, 세상 건질 현인이 없으랴.

-<어부가> 중에서

□600년 가문을 이끌어 가는 종손, 이성원 선생

-조선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안동을 흔히 “정신문화의 수도”라 일컫는다. 양반문화 또는 선비문화가 잘 보존된 곳이기 때문이다. 안동이 전통문화를 잘 보존해오고 있는 것은 이름난 집안의 종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퇴계와 농암, 학봉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던 40여 종가집들이 안동에 있다. 이처럼 많은 종택들이 안동의 문화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던 데는 농암 종손 이성원 선생의 역할이 적지 않다.
-조선 10대 가문의 종손
이성원 선생은 600여 년 전 안동에 뿌리를 내린 농암 이현보 선생의 17대 종손이다. 이성원 선생은 당시로 치자면 시쳇말로 금수저를 물고 나온 이이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농암가문의 종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이 한글을 배울 나이에 한문을 배워야 했고 붓글씨를 배워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하고 제사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처지도 모르는 순간부터 종손으로서의 자격 갖춤을 배워야 했다.
-종손, 자유로움을 꿈꾸던 반항의 시절
이성원 선생은 종손의 과정과 무게가 달갑지 않았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외항선 선장이었다.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고, 그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고등학교 때는 가출을 하는 일탈을 하기도 했다. 공부에도 취미를 잃어 성적도 최하위였고 학교도 자주 빠졌다. 퇴학의 위기 직전에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가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혀왔던,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었던 한문을 발판으로 성균관대 한문교육과에 들어간다.
-종손의 파란만장한 결혼 성사기
반항아 종손은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귀향해 고등학교 교사가 된다. 이후 선생은 결혼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파란만장하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평상시 연애결혼을 꿈꿨다. 자신만의 이상형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쉽지 않았다. 종부라는 자리가 여자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테니….
지금의 처가도 장인어른은 결혼을 찬성했지만 장모와 처형 등 여자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결혼이 무산될 뻔한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선생은 처가가 있는 경주 양동마을까지 무작정 찾아가 일주일 만에 허락을 받아내고 한 달 후에 곧바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전 신부와의 데이트는 경주에서 단 한번. 7년 동안 30여 차례의 맞선을 보고 맞은 그의 아내는 종부 이원정 여사로 회재 이언적의 자손이다.
-종손, 종택 복원을 꿈꾸다
그는 결혼 후 수몰된 종택을 복원하겠다는 새로운 꿈과 사명감을 갖게 된다. 학교를 그만두고 종택부지를 찾아 나섰다. 안동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1994년 지금의 종택이 있는 땅을 발견했다.
지난 날 영남의 문인과 지식인들이 생애 한 번씩은 꼭 거닐고 싶어 했던 꿈의 순례코스로, 지금껏 80편 이상의 기행문과 1만여 편에 이르는 시(詩)가 남아있는 곳에 보석처럼 숨어있던 땅이었다. 선생은 10년에 걸쳐 주변의 땅을 매입했다. 먼저 살림집이 될 안채를 짓고, 사랑채를 옮겨오고, 긍구당과 명농당을 옮겨왔다. 1999년 경북 유교문화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국가로부터 건축비 지원을 받아 애일당과 분강서원을 옮겨 오기까지 또 10년이 걸렸다. 결국 20여 년이 걸려 종택의 복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종손의 신 귀거래사
이후 선생은 또 한 번의 남다른 시도를 한다. 안동의 어느 집안도 해본 적이 없는 종택의 개방이었다. 처음에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학자들에게만 집을 개방했다가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한옥스테이로 발전하고 있다. 선생은 지금의 자리로 종택을 옮기고 유유자적 자연을 벗 삼아 노닐게 된 과정을 신 귀거래사라 일컫는다.
“철학자 칸트가 걸었다는 독일 하이델베르그 ‘철학자의 길’이 유명하다지만 퇴계를 비롯해 수많은 문인들이 걸으며 작품을 쏟아낸 예던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종손은 아름답고 순결한 땅 가송 을미재에서 약삭빠른 도회인의 생활 대신 텃밭을 가꾸고 고서를 뒤적이며 조심스럽게 자연에 안기고자 한다. 정리=허경테 기자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국학진흥원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다》한국국학진흥원
《때때옷 선비》한국국학진흥원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자문위원
한학자 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 목천 이희특, 동화작가 김일광,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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