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현 세무사

3.1절 아침에 국기를 달고 아침을 먹고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오래 전부터 품어온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그것은 일제강점 문제만 제기되면 예사로 일본과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을사오적들을 욕하고, 대원군, 고종 등의 무능과 실정을 질책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데, 과연 그들 이외는 역사적 심판의 대상이 될 사람이 더 이상 없는가라는 생각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몇 십 년 앞서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덕으로 국력이 부강해지자 오랜 숙원이었던 대륙진출의 야망을 위해 제국주의자들처럼 우리나라를 강점했다. 그런 데에는 썩을 대로 썩어 자생할 능력을 잃은 조선사회가 자초한 면도 있는 것 같다.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한두 왕의 실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조선 사회의 폐쇄성 문제이다. 그 시대에는 이상하게도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학자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신라 때에는 당나라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공부하고 온 스님과 학자들의 역사적 기록이 있고, 고려 때에도 원나라에 양반들의 자제들이 유학을 다녀왔다. 그 때 배워온 선진 학문인 성리학이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됐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사신들 이외에 학문을 위해 명이나 청나라조차 다녀온 기록은 없다. 나라에서 존경 받는 선비들은 외국정세를 살피기 위해서라도 자제를 유학을 보내야 할 것인데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청나라에서 전파된 양명학마저도, 유교의 한 분파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으로 몰아 배척까지 한 사회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져 노론이 권세를 누리던 조선 말기에는 성리학 이외에 어떤 학문도 감히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사상적으로 닫힌 사회가 됐다. 그런 데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향이 컸을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한 데에는 이성무 박사의 조선왕조사(1998년 판, 690~692페이지)와 미래한국(2017년 2월 452호, 82~85페이지)이 참고가 됐다.

이처럼 한 사상이 교조적으로 받들어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타산지석으로 보여주는 데가 중동지역일 것이다. 조직체가 발전하고 퇴보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하고 혁신해야 하는데, 조선은 선진 사상과 문물의 유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말기에는 일당독제가 오래 계속되어 부정부패가 심해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나라는 극도로 혼란해졌고, 결국 일본에 강점당했다.
인류학자가 쓴 역사서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전은 ‘전쟁의 역사’라 할 만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웃 나라 사이가 지금처럼 평화로운 세상은 없었다. 영화로 방영된 ‘삼국지’에 “먼저 치지 않으면 내가 토벌을 당한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런 형국이었다. 일본의 해적들이 해안을 끊임없이 노략질을 했고(왜구의 침입), 임진왜란까지 일으켜 조선을 괴롭혔다. 그렇지만 세계사적 흐름에서 보면 그것도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전쟁의 역사가 곧 식민지 역사인데, 그것을 겪지 않은 나라는 섬나라인 일본을 제외하면 없다.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인도는 영국 식민지가 되기 전에도 원나라가 세운 무굴제국이었다. 중국의 원과 청은 몽고족, 만주족이 송과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였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도 수 없이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겪은 식민지 역사를 두고두고 부끄러워하고 일본을 미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데에 있어 애국지사들의 노고가 당연히 크다. 그렇지만 미국이 일본에게 전승한 덕도 크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탐욕 때문에 미국에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서 일어난 전쟁에서 패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의 공도 있지만, 미국의 몇 년 간의 설득으로 참전했고, 일본이 원자탄을 두 번이나 맞아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할 즈음인 1945년 8월 9일에 참전하였으며, 무혈입성이라 할 만큼 큰 저항도 없어 8월 15일에는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 해방시켰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잘 살아야하고 부강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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