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석 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단원

 

헨델은 바흐와 같은 해인 1685년 독일 중부,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할레에서 태어났다. 바흐와 달리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던 헨델은 계몽주의의 틀에서 살았다. 헨델은 바흐와 달리 종교음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페라를 집중적으로 작곡하였다. 아마도 헨델은 서민적이고 자유로움이 많았던 것 같다. 헨델은 바흐와 달리 유럽등지를 돌며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오페라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헨델의 집안에는 음악가가 없었다. 바흐와 달리 헨델을 집안은 부유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가 음악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헨델의 열정을 아버지는 막을 수 없었다. 헨델은 고향인 작센의 할레에서 오르간 주자, 쳄발로 주자가 되었고 바이올린, 오보에를 배우고 대위법의 기초를 철저히 익혔으며, 독일 작곡가와 이탈리아 작곡가의 악보를 필사하며 음악적 감각을 키웠다. 헨델은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 함부르크에서 음악가 요한 마테존 등과 교류하며 최초의 오페라 ‘알미라’를 작곡하였다.

1706년부터 1710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헨델은 로마,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의 주요 후원자들, 음악가들과 사귀었다. 당대의 음악가 코렐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교류하며 ‘아그리피나’ 등의 오페라를 썼다. 1710년 런던을 방문한 헨델은 그곳에서 아리아 ‘울게 하소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페라 ‘리날도’로 명성을 얻게 된다. 헨델의 음악은 독일적인 중후함과 이탈리아적인 명쾌함, 프랑스적인 우아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후 헨델은 영국으로 귀화하게 되는데 당시 영국은 마치 근대 이후의 홍콩과 비슷했다. 영국은 여러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었는데, 이러한 국가적인 양식을 넘는 영국사회의 분위기는 헨델의 특성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은 헨델에게 음악적 재능을 펼칠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헨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소프라노 쿠조니와 메조소프라노 보르도니를 스카우트해서 오페라를 잇달아 히트시켰는데, 문제는 여가수들의 사이가 나빴던 것이다. 헨델이 이 두 여가수를 오페라 ‘알렉산도르’에 더블 캐스팅했을 때, 둘이 노래하는 아리아의 배역 비중, 노래의 음역은 물론 악보의 음표 개수까지 똑같이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여가수는 헨델의 라이벌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나테(Astianatte)’ 공연 때 서로 눈을 흘기며 노래하다가 결국 머리끄덩이를 잡고 옷을 찢으며 싸우기에 이른다. 때마침 각 가수의 팬들이 싸움에 합류하여 공연이 난장판이 된다. 이 공연은 캐롤라인 왕세자빈이 관람하고 있었는데, 이 공연으로 영국에서 오페라에 대한 비난이 확산되면서 헨델의 오페라들도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게 된다.

헨델이 속한 오페라단 ‘제2아카데미’는 1737년 문을 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헨델은 오른쪽이 마비가 되어 걷거나 말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헨델을 더 힘들게 한 것은 예전처럼 빨리 작곡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헨델은 초인적인 의지로 되살아나,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단번에 재기에 성공한다. ‘메시아’는 포항에서도 자주 연주되던 곡이다. 솔직히 메시아의 백미는 ‘할렐루야’이다. 거의 한 시간을 ‘할렐루야’를 듣기 위해 우리는 다소 지루함을 버텨야 한다.

메시아의 ‘할렐루야’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할렐루야’ 합창이 시작될 때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는 관례가 있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가 공연되던 중, ‘할렐루야’ 합창에서 ‘왕 중의 왕’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영국 왕 조지 2세가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다른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관례가 생겼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조지 2세가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고 그를 맞이하려고 청중들이 모두 일어났는데, 마침 그 때 ‘할렐루야’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헨델은 ‘메시아’를 통해 완전히 재기했다. 헨델은 ‘메시아’를 32차례나 직접 지휘, 과거의 명성을 단숨에 되찾게 된다. ‘메시아’의 자선 연주의 수익금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음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 음악은 굶주린 자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다.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고아들을 키웠을까!”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를 지휘하던 헨델은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쓰러졌고, 헨델은 부축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병상에 누웠다. 이후 1주일 뒤 74살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바흐와 헨델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평행이론 같지만 둘은 묘하게도 존 테일러라는 세기의 돌팔이 의사에게 진료 받고 말년에 실명을 하게 된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그들이지만 서로 달랐기에 음악적 조화를 이루었던 그들을 생각하면서 다름이 있어서 다양한 음악을 우리가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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