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때 5년간 옥고 기록 뒤늦게 밝혀져...

▲ 이봉술 의사의 큰 조카 이택우 씨(사진 좌측)가 김관용 도지사로 부터 훈장증을 받고 있다.

영덕군 남정면 회3리 출생 고 이봉술(1881년 생) 의사가 대한민국의 국가 건립과 자주독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난 3월 1일 경북도청에서 열린 제 98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으로써 그 가족의 일대기가 주목받고 있다.

이날, 고 이봉술 의사의 큰 조카 이택우(86, 영덕군 남정면) 씨가 유족을 대표해서 김관용 경북지사로 부터 훈장을 받았다.

보훈처 홈페이지에는 이 의사의 공적을 '1908년 음력 1월 경북 경주, 영천 일대에서 김상만 의진에 참여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잡혀 징역 5년을 받았다' 라고 간략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정부에서 기록물을 토대로 훈장을 추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사의 조카 이춘우(이택우 씨의 동생) 시인은 대경일보와 만나 “가정도 돌보지 않고 조국광복을 위해 애쓰시다 옥살이까지 하신 큰아버님의 삶이 뒤늦게나마 밝혀져 다행이다”며, “큰아버님의 함자는 호적상에 이봉술(李鳳術), 족보 상에는 항렬자인 ‘종’ 자를 써 종욱(鐘旭) 이다. 보훈처 공적기록을 보니 이학산(李鶴山)이라는 이명(異名)도 있는데, 당시 의병들의 행적이 그러했듯이 분명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도 달리 쓰신 게 역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큰아버님의 고조부님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판윤, 조부님은 중추부사를 지내셨다는 기록은 교지를 통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큰아버님께서 생전에 독립운동을 하신 행적이 1세기가 지나서야 밝혀지다니…” 라며,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집안 내력을 이어갔다.

그는 “큰아버님께서 의병 활동차 출향하신 이후 슬하의 두 딸은 출가하고, 큰어머님은 시동생네인 우리집에서 40여 년 간 얹혀사시다 남편(고 이봉술 의사)의 생사조차 모른 채 83세로 작고하셨다. 그 후 저의 부모님은 형(이봉술) 내외의 제사를 모셔왔고, 장남(이택우)을 (형이 아들이 없을 경우 장자를 양자로 보내는 유교 관례대로) 족보상에 양자로 올렸으나 호적 상에는 등재를 하지 않았기에 실정법 상 유족연금 수혜자가 될 수 없기에, 저는 큰아버님(이봉술 의사) 혈육인 두 딸의 직계 외손자 한 명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최근 외손자를 찾는 데 성공했다. 늦게나마 외손이라도 보훈혜택을 받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 시인은 독립유공자 직계후손을 찾기 위해 포항과 영덕의 경찰서, 행정관서 등을 수 차 직접방문했으나 ‘개인정보보호법 상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어야만 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는다는 명백한 설명에도 이처럼 벽이 높은 걸 보고 그는 “융통성 없는 법 적용과 해석이 마치 아직도 일제치하 같다”며 분통을 터뜨리면서 “차후에라도 독립유공자나 국가유공자 관련서류는 관계공무원들이 적극 도와줄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유 대한민국이 일제로 부터 해방된 지 72년이 됐다. 조국 광복의 주역들이 대부분 작고한 시점인데 아직도 그 공적이 후손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상황이다"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궁핍한 한을 풀어주는 것이 해 마다 3·1절 행사와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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