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역동서원(易東書院)

 

역동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2번지에 있다. 안동역에서 영덕 방면으로 약 10㎞ 가면 안동대학교가 나오는데 역동서원은 안동대학교 도서관 뒤편에 야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역동서원은 안동지역 최초의 서원이며, 또한 조선시대 서원제도를 정착시킨 퇴계 이황의 서원 창설운동의 상징적인 서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역동서원은 경상북도 문화재 시도기념물 제146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들어가는 출입구 솟을대문 위에는 입도문(八道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출입문 옆에는 우탁 선생을 소개하는 안내문과 역동우탁선생시조비(易東禹倬先生時調碑)가 세워져 있다. 우탁 선생의 인생무상과 늙음을 탄식한 두 수의 시조는 전해 오는 시조 가운데 가장 오랜 작품이라는 데서도 우리 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작품의 아름다움은 고시조의 많은 탄로(歎老)를 읊은 작품 가운데 단연 백미(白眉)라 하여 지나침이 없다.

“춘산에 눈 노긴 바람 건 듯 불고 간듸 업다/ 져근 듯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노겨 볼가 하노라 //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맏대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더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렴 길노 오더라.”

◇연혁
경북 안동시 송천동 371번지 안동대학교 내에 있는 서원이다. 1567년(선조 즉위)에 退溪(퇴계) 이황의 발의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본래 낙동강 상류 ‘오담(鰲潭)’에 창건하였으며, 1964년(숙종10년) 역동(易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6년 지방유림의 발기로 구계서원(龜溪書院)과 도산서원의 당회에서 중건을 결의하고, 1969년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인해 서원의 옛터인 지삼의(知三宜)는 수몰되고 그 후 송천동이 안동대학교 교지로 편입되면서 1991년 문중에서 안동대학교에 기증하였다. 매년 2월과 8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안동대학교 내 평평한 대지에 앉혀진 서원의 경내에는 강당, 사당, 동서재, 고직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가 자리하고 정면으로는 강당이 서있다. 강당영역의 우측 뒤편에 사당영역이, 좌측에는 고직사 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
상현사(尙賢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측면에 풍혈판이 붙어 있으며, 건물 전체에 단청을 했던 흔적들이 조금 남아 있다. 모든 기둥을 두리기둥으로 하였으며, 출입문의 출입문의 모양이 매우 화려하고 독특한 것이 특징이다. 문의 아래 부분은 청판으로 만들었고 윗부분에는 완자살문의 변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당
명교당(명교堂)의 현판을 단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에 5량가구로 되어 있다. 중앙의 3칸이 마루공간으로 우물마루로 꾸미고 전면은 문을 달지 않아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후면으로는 당판문을 각각의 칸마다 두었다. 마루의 좌우는 방이 대칭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우측방에는 직방재(直方齋), 좌측방에는 정일재(精一齋)라는 현판이 출입문 위에 걸려 있다. 방들은 전면으로는 쌍여닫이창을 내고, 마루에서 방으로의 출입문은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하였는데 중앙의 2짝은 세 살청판문으로 끝의 2짝은 불발기문으로 하여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방과 마루 전면에는 길게 툇마루가 이어져 있어 마루공간과의 연계성을 효율적으로 만들었으며, 툇마루의 좌우 끝에 판문을 닫아 작은 부분의 공간 마무리까지 고려하였다.

◇동재·서재
같은 형식의 평면을 하고 있는 동서재는 사물재(四勿齋), 서재에는 삼성재(三省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서재의 가장 우측 방 입구에 광명실(光明室)이라는 현판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로 되어 있으며, 우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마루방을 꾸몄다.

◇고직사
고직사는 서원 영역의 좌측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위치해 있으며, 가운데 넓은 마당을 두고 안채, 아래채, 대문채가 앉아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좌로부터 ‘부엌-두 칸 크기 방-한 칸 크기 방’으로 구성된 –자집이다. 아래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좌로부터 ‘방-방-마루-광’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문채는 3칸 규모로 평대문형식을 하고 있으며, 좌우에 광을 두었다. 고직사로의 출입은 고직사의 대문을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강당 옆으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나 있다.

◇기타
입도문의 현판이 달린 외삼문은 솟을 대문형식으로 3칸 규모이다. 중앙에 문을 두고 좌우에 방과 광을 연결하였으며, 상부에 화려한 화반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내삼문은 3칸 규모로 평대문형식에서 중앙의 신도문만 기와를 조금 높이 얹었다.

◇역동 우탁 선생(1263-1342)
고려 말기의 학자 역동의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본명은 탁이며 자는 천장(天章)혹은 탁보라 했고, 호는 단암 혹은 백운당이라 했는데 세칭 역동이라 부르고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라 한다.
고려 원종4년(1263)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여 안향(安珦)에게 수학하고 17세에 향공진사가 되어 홍문관수찬에 임명된 후 여러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안동 예안에 물러나 학문과 후진양성으로 여생을 마쳤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라 역동의 위상을 요약한다면 첫째, 학문적으로는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열어나간 선구자였고, 특히 역학의 대가로서 추앙받았다. 둘째, 관료로서 과감히 미신을 타파하고 군왕의 패륜행위를 바로 잡기 위하여 지부상소(持斧上疏)를 감행함으로써 후대 관료의 귀감이 되었다. 셋째, 안동전통문화 속에서 역동은 도학, 예의, 절조(知三宜)를 상징하는 향토의 선현이었다. 그로해서 퇴게와 그 문도들에 의해 존숭 받았고 조선조 안동선비문화의 사표가 되었다. 넷째, 한국 시가문학사적 관점에서 안동지역은 사대부가 치사하여 도학적 이념과 자연합일을 우리말 시가로써 노래한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창도한 곳이다.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향토시가의 유풍은 역동의 시조를 기원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고, 따라서 역동은 이 지역 최초의 시조작가로서 소중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지부상소(持斧上疏):도끼를 메고 소리 높여 간하다
우탁이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 숙창원비를 간음한 일이 있었다. 이에 역동이 백의에 거적과 도끼를 메고 대궐 뜰에 나아가 소리 높여 간하니 동료들은 떨었으며 임금은 부끄러워했다. 이를 ‘역동의 지부 상소’라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되옵니다’고 한 충신열사는 많다. 그렇지만 도끼를 메고 자신의 말이 틀리다면 ‘이 도끼로 내 머리를 내리치라’고 한 역동이 처음이다. 그래서 지부상소는 전통이 되었다. 우탁은 언제부턴가 이름보다 역동 선생으로 더 알려졌다. 중국의 역학(易)이 우리나라(東)로 전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동국유사>의 기록은 이렇다.
우탁이 사신으로 들어가니 원나라 천자가 “그대는 역리(易理)를 아느냐”했다. 답변하기를 “우리나라는 역이 없고, 또 아는 학자라도 어찌 통달한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역은 이학(이학)의 정수이니 바라옵건대 한 번만 보여 주시옵소서”했다. 천자가 역 책을 내려주니 여관으로 돌아와 하룻밤 만에 다 읽고 돌려주었다. 다음날 천자가 “모두 읽었는가”하니 답변하기를 “거의 보았습니다”했다. 천자가 즉석에서 암송하도록 하니 거의 막힘이 없자 칭찬하기를 “아름답구나! 작고 궁벽한 나리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다. 주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구나!”했다.
이런 역동이었지만 격변의 고려 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 예안(부포)에 들어와 유유자적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일찍이 안향 문하에 있었는데, 안향은 눈을 감으면서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내가 죽거든 역동을 나와 똑같이 스승으로 섬기라”고 유언했다. 그리하여 역동은 안향의 제자이며 당대의 인물들인 권부, 백이정, 이제현, 이곡, 이조년, 안축, 김득배 등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사후 성균관대사성 이색이 주청하여 ‘문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동은 조선조에 더욱 평가받았다. 태조는 “우탁은 도학을 밝혀 동방 이학의 조가 되었다”고 했고, 명종은 불교를 배척하고 도학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라 했다. 1570년 역동을 다시 평가한 분이 있었으니 퇴계가 바로 그다. 퇴계의 한 마디는 추모 건물 역동서원을 짓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동 최초의 서원이 부포에 창건되었다. 이후 안동은 마흔 한 개의 서원이 세워져서 유교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퇴계의 <역동서원기문>한 대목은 이러하다.
“선생의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만하다.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후인의 사표가 되니, 백 세의 제향을 받을 자 선생이 아니면 그 누구겠는가!”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역동의 학문과 귀거래를 말해준다. ‘물러남과 불러도 올라가지 않음’은 ‘진퇴의 문제’로 도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필수덕목이었다. 안동의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도학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서원을 지어 백 세 뒤에라도 추모해야 할 인물로 여겼다. 이후 역동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단양의 단암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구계서원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국학진흥원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이성원·푸른역사

<자문위원>
한학자 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 목천 이희특, 동화작가 김일광,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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