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아이들이 모두 떠나가고 난 집이 썰물의 해변 같다. 짝을 찾아가면서 미처 챙겨가지 않고 남겨 둔 옷가지며 흔적들을 지우는데 쓸쓸함이 밀려온다. 끊임없이 내 안의 것들을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별에는 서툴다.

언젠가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던 집이었다. 그러나 오래 비워두었던 집은 식은 화로처럼 체온이 빠져나간 집의 뼈들이 바람에 덜컹거리고 있었다.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대들보며 서까래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푸석거렸다. 한때 넘쳐나는 웃음으로 가득했던 집은 제 수명을 다하고 조금씩 세상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집은 이건(移建)했다. 육이오 사변 때 포격으로 쓰러진 집을 들보 두 개로 근근이 지탱하며 살았던 아버지는 평생 튼튼하고 반듯한 집 한 칸이 소원이셨다. 때 마침, 강 건너 마을이 공단으로 조성되면서 이주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버려지는 집 한 채를 샀다. 그리곤 대여섯 대의 소달구지에 구들장과 목재를 싣고 와 직접 집을 지었다.

목수보다 더 목수 같았던 아버지의 헌신적인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목재를 대패질하고 살뜰히 못질을 했다. 흙벽돌도 하루에 일정량 이상 쌓지 않았고, 기왓장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정성으로 집 한 채를 지어 다섯 명의 형제들을 낳아 키웠고, 그리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다.

우리가 집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외형적인 것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한 집안의 내력, 가족, 휴식, 평안, 희노애락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개념일 것이다. 그것들이 얽히고설키어 집은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집으로부터 비롯되고 마침내 집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고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는 것이 집이다. 아버지의 집도 그랬을 것이다. 자식을 낳고 가족을 이루며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집은 행복했을 것이다. 가끔씩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난과 역경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마저도 아버지에겐 행복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자식들이 다 떠나고 난 빈집에서 아버지에게 있어 집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와 둘만이 있는 안방에서 아침을 먹고 얼음장 같은 방에 불을 들이며 텅 빈 마당에 저녁이 찾아왔을 때 아버지의 집은 어떻게 외로움을 달랬을까. 쓸쓸함이 켜켜이 쌓인 툇마루에 앉아 골목 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는 집도 사람처럼 운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람에 의해 집의 관절이 삐걱거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집주인의 감정이 그런 현상에 투영되어서 그런지 모를 일이지만 조금씩 빈집이 되어 갔을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안의 대들보며 서까래는 벌레가 들어 파먹고 갉아먹었을 것이며 잠들지 못하는 밤, 문설주는 바람에 자주 덜컹거렸을 것이다. 빛나던 추녀는 퇴색해갔을 것이며, 담은 서서히 무너져갔을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나고 요즘은 남편과 둘만 지내고 있다. 아이들의 온기가 없어진 집에서 나는 가끔 집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내가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이 그런 것처럼 나도 조금씩 빈집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버지가 조금씩 빈집이 되어갔던 것처럼.

그러나 빈집이 자연현상의 필연이라면 이것도 담담히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멸한다고 했으니 나또한 예외일 수는 없으리라. 살아오면서 자꾸 채우기만 했던 욕망들을 내려놓고 조금씩 가벼워짐에 행복을 느끼고 싶다. 비워지면서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나는 행복한 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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