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新幹會)를 이끈 경북인

▲ 경북도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간회 김천지회 창립 기사(동아일보 1927년 6월20일자)
2017년 2월15일은 신간회가 창립된 지 꼬박 90주년이 된 날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은 이념과 노선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특히 두드러진 현상은 사회주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국내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으로 크게 갈라졌다. 때문에 이를 아우르는 것이 독립운동계의 큰 과제였고, 1926년 6.10만세운동은 그 흐름을 만들어낸 중요한 단초였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10일 융희황제의 장례일에 일어난 제2의 3·1운동이다. 이를 이끌어낸 인물이 경북 출신의 권오설(안동)과 김단야(김천) 등이다. 특히 권오설은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3·1운동처럼 온 겨레가 참여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 종교계·청년계·학생계를 아우르고자 했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로 전국으로 퍼져나가지 못했으나, 1927년 좌우합작체인 신간회 설립의 밑거름이 됐다. 그 역사의 중심에 바로 경북인이 있었다.

6.10만세운동으로 조선공산당이 와해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1927년 2월15일 좌·우를 아우른 신간회가 탄생했다. 여성들도 통일적 지도기관인 근우회를 조직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 정치사상을 초월해 힘을 모은 것이다. 신간회는 지회 설립에 힘써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 해산될 때까지 전국에 150여 개의 지회가 만들어졌으며, 회원 수도 4만여명에 이르렀다.

경북도도 1927년 6월 신간회 김천지회를 시작으로, 지회 설립이 활발하게 이뤄져 총 23개 군 가운데 21개 군에서 지회가 설립됐다. 당시 강원도에 속했던 울진군을 합하면 모두 22개 군이다.

이들 지회 가운데 특히 신간회 안동지회는 전국에서 평양지회 다음으로 그 규모가 컸다. 안동지회는 무려 7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만큼 경북지역의 신간회 운동은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경북의 지회들은 주로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저항하기도 하고, 농민·노동·여성·청년·형평·학생운동과 연계해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활동이 활발했던 안동지회의 경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영주·봉화·영양지회와 더불어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또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했다.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자 여성들도 통일적 지도기관인 근우회를 조직했다. 경북에서도 대구·하양·군위·영천·김천·영주 6개 지역에서 근우회 지회가 설립됐다. 이들 지회는 부인 야학이나 강좌·강습·토론회를 열어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교양에 힘썼다. 이를 이끌어간 인물이 정칠성(丁七星)·이춘수(李春壽)·백신애(白信愛) 등이다.

신간회는 일제하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였다. 특히 경북은 거의 전역에서 지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펼쳐 그만큼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또 신간회 안동지회의 경우는 단순히 좌우연합체 성격만이 아니라, 적극적 항일투쟁조직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복 72주년을 맞고 있지만 여전히 남북으로 나뉜 상태에서, 좌우를 아울렀던 신간회는 우리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 이 글은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Ⅴ, 경상북도, 2014를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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