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토마스 홉스는 남을 헐뜯으며 즐거워하는 것을 자연적 경향성이라고 말했는데, 거짓말 역시 그런 것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거짓말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이라면 그것 자체를 가지고 잘잘못을 탓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거짓말이 그르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일반 상식이다. 왜 그럴까. 그 까닭은 우리가 그만큼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진실하다는,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것을 것이라는 믿음(신뢰; trust) 위에 터 잡는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도 없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거짓말을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이라는 이유로 방치한다면, 사회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사회에는 각종 규범과 제도가 마련된다. 이런 규범과 제도는 사회가 유지·번영할 수 있도록 자연적 경향성을 가시적으로 통제하는 기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신뢰에 대한 요구와 자연적 경향성간의 타협과 조절의 산물인 셈이다. 적어도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경향성이 실제로 어떤 것이든 간에, 신뢰해도 된다는 것이 제도와 규범의 최소한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메커니즘이 근본적으로 도전 받고 있다. 제도와 규범이라는 메커니즘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신뢰마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지닌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일삼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은 인지상정이라 해두자. 제도와 규범을 확보하는 보루로서 검찰의 위상은 어떤가. 검찰을 믿지 못하여 특별 검사제가 도입될 정도로 최후의 보루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다. 심지어 사법적 정의의 최후의 수호자라 일컬어지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대한 불신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두가 사회의 근간인 ‘신뢰’의 위기를 징표해주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1일 오전 9시 25분께 검찰에 출석해 다음날인 22일 수요일 오전 6시 54분까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나왔다. 박 대통령은 대부분 검찰의 질문에 본인은 모르는 사실이라고 답변을 하고 있다.
조사 후 재판에서 뇌물수수 혐의가 인정될 경우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잘못은 인지상사(人之常事)요, 용서는 신의 본성’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잣대는 ‘인지상사’를 대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신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중기준이 신뢰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현실 사회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진리가 무참히 외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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