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벽계서원(碧溪書院)

안동시 송현오거리에서 영주로 가는 5번국도로 올라 주행하면 북후면소재지에 다다른다. 안동의 진주강씨는 북후면 옹천리와 장기리에 집성촌이 있으며 인근 물안리, 두산리, 월전리 등지에 수백 호가 세거하고 있다. 옹천의 5일장이 서는 곳이라고 하여 장기(場基)라고 하였으며, 장기리는 황새골과 벽절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장기리에 거주하는 총 80가구 가운데 진주강씨는 40가구 정도로 벽절에 모여 살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입향조 강시(姜蓍)가 성균시에 급제하여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한 인연으로 강시의 아들 5형제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안동과 봉화(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등지로 낙향하였다. 장남 강회백(姜淮伯)은 안동 북후면에 자리를 잡았고, 강회백의 아들 강종덕(姜宗德)은 예천 감천으로 옮겨 살았다. 이후 강종덕의 증손자 강두전(姜斗全)이 옹천에 터를 잡으면서 집성촌을 이루었고, 강두전의 후손들은 장기리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쪽에 장터들로 불리는 넓은 들이, 뒤쪽으로 고개인 매방재가 있다. 마을 북쪽에는 바윗굴과 암벽이 있는데, 암벽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옥산사 마애약사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선비들은 높은 학식과 교양을 겸비했음은 물론이고 권력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용기와 실천하는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벼슬이나 재물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귀감이 되고 있다. 옥계(玉溪) 강봉문 또한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학문에 전심하고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강봉문(姜鳳文)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벽계서원의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다. 대다수의 서원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임금이 직접 하사한 편액이다. 벽계서원의 강당인 정륜당(正倫堂)의 난간은 매우 아름답다. 아직비지정문화재로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 932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860년(철종 11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강봉문(姜鳳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고종 5년)훼철되었다가 1962년 복원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과 9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효사(尙孝詞), 6칸의 정륜당(正倫堂), 신문(神門), 1칸의 진사청, 4칸의 고직사 등으로 되어 있다. 사당인 상효사에는 강봉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정륜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화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영역과 사당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영역 사이에 길이 나면서 완전히 담장을 따로 구성하는 독립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당이 있는 곳은 지대가 높아 길에서 출입문까지 계단이 나있으며, 뒤편으로는 울창한 송림이 배산하고 있다. 강당의 영역 안에 직교하고 있는 건물은 동재에 해당한다.

◇사당
상효사(尙孝詞)라고 현판이 붙은 사당은 1934년에 지은 것이다. 강당의 영역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했던 흔적은 보이나 지금은 거의 지워진 상태이다. 주칸의 넓이가 협칸에 비하여 넓고, 출입문도 쌍여닫이와 외여닫이로 차이를 두었다. 측면에는 풍혈판이 붙어 있고, 채광과 통풍을 위한 창도 내었다.

◇강당
강당인 정륜당(正倫堂)은 지형의 고저가 전혀 없는 평지에 얹혀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전후툇집형식을 취하고 있는 팔작기와집이다. 중앙에는 마루를 들이고 전면에 들어열개 쌍여닫이 사분합문을 달았으며, 좌우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방은 전면으로 쌍여닫이문을 내고, 측면으로도 외여닫이문이 있다. 방과 마루의 앞으로 길게 툇마루가 이어지고 계자난간을 둘러 정자의 형식을 ㅍ취하고 있다.
집의 측면에는 쪽마루를 붙였는데 앞의 툇마루와 연결이 되어 동선을 이어주고 있다. 방에 불을 넣은 아궁이가 좌측 방은 측면에 우측은 전면에 설치한 것도 특이하다.

◇동재
동재는 강당과 같은 영역의 담장 안에 위치하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우측에 서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 집으로 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달고 가운데 칸의 앞에만 쪽마루를 붙였다.

◇기타
강당영역으로 출입하는 문은 1칸 크기의 사주문이고, 사당영역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3칸 규모의 평대문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태극문양을 그려 넣었다.
사당 뒤편에는 수령 200년 높이 20m 둘레 2.5m의 소나무가 잇는데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배향인물

◇강봉문(姜鳳文)(1735-1815)

영조11년∼순조 15년, 본관은 진주로 자는 주서(周瑞)이다. 시의 15대손으로 부친은 강득위(姜得渭)다. 호는 옥계(玉溪)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출생지는 안동으로 어려서부터 사친(事親)의 도리를 알고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그 효행이 조정에 알려졌다. 강보(江甫) 유홍원(柳弘源)에게 사사하였으며 향시에 합격하고 서울 생진시 복시에 응시하였으나, 시골의 비유라 하여 해가 기울도록 어려운 것을 묻고 시험하자 스스로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출사의 뜻을 버리고 사익재(四益齋)라는 서당을 지어 후진양성에 전력했다. 그의 문하에서 수업한 사람이 100여 명인데 성취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815년(순조 15년)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847년(헌종 13년) 암행어사(暗行御使)가 파견되어 효행에 대한 실사를 시행한 결과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종직되었다. 저서로는 ‘옥계유고(玉溪遺稿)’가 전하고 있다.  
‘옥계유고’는 1829년(순조 29)에 그의 손자 강주복(姜周福)이 간행하였는데,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적은 ‘답조석사(答趙碩士)’, 제자들에게 보낸 ‘여제군(與諸君)’, 조상에 대해 추모한 ‘족보서(族譜序)’, 사익재(四益齎)라는 서당을 짓게 된 내력 등을 적은 ‘사익재신창기(四益齋新創記)’, 스승인 유홍원(柳弘源)을 애도하는 ‘제강포유선생문(祭江浦柳先生文)’, 자신의 일생에 대한 행적을 적은 ‘유사기략(遺事記略)’, 효행에 대해 포상의 전말을 적은 ‘효자전(孝子傳)’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화
1756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매일 성묘(省墓)했다. 1775년 중년(中年)에는 사익재에 학동(學童)을 모아 훈학(訓學)하니 그 문도(門徒)의 수가 백여 명에 이르렀다. 모친이 병(등창)을 얻어 의원(醫員)에 문약(問藥)한즉 큰 뱀을 다려 먹으면 고친다 하여 때는 겨울이라 뱀이 동면(冬眠)할만한 곳을 찾아 파헤치기를 수 없이 되풀이 한 바 손과 발이 동상에 걸려 고생하던 중 꿈에 집 앞에 있는 오래 묵은 큰 뽕나무 밑둥 썩은 구멍에 뱀이 서려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나 행여나 하여 초롱불을 들고 현장을 가본즉 아니나 다를까 꿈이 현실이었다. 아! 하늘이시여 감사를 올리고 그 뱀을 잡아 시탕(侍湯)하여 모친 병을 고치셨다.
이웃집 어미개를 범이 물어가 새끼강아지가 애처롭게 울부짖는 것을 보시고 불쌍하게 여겨 소쿠리에 담아와서 집에 기르던 암캐의 품에 안겨주어 젖을 먹게 하여 강아지의 생명을 구해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동사지의유구지번(冬蛇之異乳狗之變 : 겨울에 뱀을 구하는 이변과 다른 어미개에서 젖을 먹여 살려냄)이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이 소문으로 회자되어 안동, 영주, 예천, 봉화 등지의 뜻있는 선비들이 여러 차례 관아에 상서 진정하여 마침내 예조(禮曹)에 알려지고 예조에서 김응균(金應均) 어사를 명하여 현지실상을 탐사케 하고 사실을 확인 복명하여 예조에서 하늘이 내린 효자(孝子)라 하여 1848년 조봉대부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의 교지(敎旨)를 하사(下賜)했다.

-벽계서원 인근, 마애약사여래좌상
장기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마애약사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은 옥산사(玉山寺) 뒤편 화강암 자연 암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상이다. 북후면소재지에서 장기리 벽절골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어 북후초등학교와 벽계서원(碧溪書院)을 지나 오른쪽 산길로 약 30분 정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암벽의 상부에 돌출된 넓은 바위가 비바람을 막아 주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불상의 맞은편 언덕에는 전탑(塼塔)의 기단부가 파괴된 채 남아 있어 ‘영가지(永嘉誌)’에 소개된 월천전탑(月川塼塔)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산사 마애약사여래좌상은 1984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옥산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총 높이는 약 2m이고, 불신 높이는 1.3m이다.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蓮華臺座)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를 갖추고 있는 여래좌상이다. 대좌를 장식한 연화무늬는 복판(複辦)의 연꽃으로, 하단은 5판(瓣), 상단은 7판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큼직함 육계(肉髻)가 높게 솟아 있으며, 갸름하고 풍만한 얼굴의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를 돋을새김하였다. 가늘게 뜬 긴 눈 위에 표현된 호형(弧形)의 눈썹은 오뚝하게 새겨진 코의 윤곽선으로 이어졌으며, 작게 표현된 입술은 양쪽 끝을 살짝 눌러 은은한 미소를 나타내었다.입술 밑에는 반원형의 주름을 새겨 얼굴의 양감을 강조하였고, 두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을 듯하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상반신은 당당한 어깨에 허리를 잘록하게 새겨 풍만한 가슴을 표현하였으며, 앞가슴 부분에는 군의(裙衣)의 띠 매듭을 갖추고 있다. 결가부좌를 한 하반신은 무릎을 넓게 표현하여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를 보여주고 있다. 오른손은 비스듬히 내려 손가락이 땅을 향하도록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복부에 대고 약합(藥盒)을 받쳐 들어 약사여래임을 보여주고 있다.우견편단의 법의는 비교적 강한 윤곽의 옷 주름으로 표현되었으나, 하반신에서는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광배(光背)는 바위 면을 배 모양으로 얕게 파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불상의 오른쪽 앞면에는 협시보살의 하반신이 남아 있는데, 구조로 보아 별도의 석재에 조각한 상반신을 끼우도록 되어 있어 경주 선도산 마애삼존상의 보살상 형태와 비교된다. 왼쪽에도 협시보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은 없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제작 시기는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좌상의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협시불(脇侍佛)을 갖춘 삼존상(三尊像)을 모셨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이다. 본존의 좌우에 협시불을 다른 돌[別石]로 세웠던 듯 암벽의 오른쪽에 협시불의 무릎 아랫부분을 새겼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법의의 옷자락이 대좌에까지 덮여 있는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데, 양발은 약간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예는 안동지역에서 유일하다.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한국국학진흥원편·경상북도
학술총서(10)안동의지명유래·안동민속박믈관

<자문위원>
한학자 목천 이희특, 동화작가 김일광,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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