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그 집 우물은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법 없이, 늘 맑고 시원한 물이 찰랑거렸다. 심연의 바닥처럼 그 깊이를 가늠 할 수도, 담고 있는 양도 알 수 없었다. 깊숙한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지면 벽을 차고 올라오는 울림조차 맑고 시원했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두레박에 담겨 올라온 물은 달디 달았다. 한 여름, 들판에서 땀 흘리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내게 그 집 물 한 주전자를 길어오라고 하셨다. 땅에 닿을 듯한 커다란 주전자로 길어온 물에 아버지는 간장 몇 숟갈 던져 넣고는 손가락으로 휘이휘이 저어 단숨에 들이키셨다. 아마 땀으로 결핍된 나트륨을 그렇게 보충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남은 물에 송송 썬 오이를 넣고 냉국을 만들어 남은 갈증을 채워 주었다.

머지 않는 곳에 강이 있었던 탓일까? 유년의 우리 동네엔 우물이 많았다. 파기만 하면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수질이 좋은 물은 아니었다. 백여 가구의 초가집 사이에 띄엄띄엄 섞여 있는 기와집에는 그들만의 단독 우물이 있었지만 물맛은 집집마다 달랐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맑고 깨끗한 공동 우물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구가 나눠 먹고, 사용하다 보니 샘솟는 물의 양보다 퍼내는 양이 더 많아 자주 바닥을 보였다. 그나마 그런 우물도 일 년에 한 번 대 청소를 하는 날이면 사용이 일시 중단되었다. 건장한 동네 장정 두어 명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 남아 있는 물을 퍼내고, 깨끗이 바닥 청소를 했다. 벽에 붙은 이끼를 긁어내고, 벌어진 틈새를 메우는 보수작업도 했다. 미처 건져 내지 못하고 벼르던 숟가락이며 동전 같은 잡동사니도 꺼냈다. 그런 다음 새끼줄로 우물을 빙 둘러 치고는 물 깃는 것을 금지 시켰다. 마치 그 동안 목마름을 해결 해준 샘의 고마움에 경건함을 표시하는 의식 같기도, 다시 깨끗한 샘솟음을 기다리며 휴식을 주자는 의미 같기도 했다.

자연 사람들은 흩어져 물을 찾아 나서야 했다. 멀리까지 다른 공동 우물을 찾아가거나, 눈치를 보면서 가까이 있는 기와집들의 우물을 이용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가까이 있는 우물을 두고 굳이 멀리까지 그 기와집 우물을 찾아 갔다.
그 집 깊숙한 안채 부엌 앞에 고깔 지붕을 한 작은 우물이 있었다. 깨금발로 물을 깃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듯, 큼직한 다듬잇돌 하나가 놓여 있고, 우물가에는 안주인의 심성만큼이나 예쁜 꽃밭도 있었다.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다복이 꽃밭가득 피어 있던 그 곳은 내 유년의 가장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물 옆으로 작은 문 하나를 만들어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을 배려해 주었다. 안주인의 따뜻하고 세심한 인심이 여느 집과는 달랐다.

제사가 있거나 장을 담는 날, 혹은 특별한 날 음식 할 때면 어머니는 먼 길 마다않고 그 집을 다녀오셨다. 아마도 그 집의 다섯 자식 모두가 반듯하게 자란 것을 두고 어머니는 물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는 듯 했다. 그러나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맞아주던 안주인은 몸이 몹시 약했다. 방에 누워 있거나 마루에 나와 벽을 기대고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넘어질라 조심해서 가거라.” 큰 물주전자를 감당하느라 허둥대는 내게 늘 걱정 어린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어쩌다 안주인이 부엌에 있는 날이면, 그 앞을 알짱거리며 그녀가 건네줄 먹을거리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 해도, 우물가 꽃밭에는 봉선화, 채송화, 분꽃이 앞 다퉈 피었다.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땀을 닦아주던 안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부엌을 기웃거려도, 안방을 훔쳐보아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병이 깊어져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갔다고만 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다시 피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눈이 왕방울만한 새 안주인이 들어왔다. 담장은 더 높아졌고 황소만한 개가 집을 지켰다. 설상가상으로 새 안주인은 우물로 난 문도 막아버렸다. 차츰 물을 길러 가기가 싫어졌다. 대문으로만 드나들어야하는 어머니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점점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서 아버지는 물맛이 변했다고 했다. 예전의 그 맛이 아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우물은 물을 긷는 사람이 있을 때 더없는 샘솟음을 거듭한다. 내 유년의 그 집 우물도 많은 사람들의 물동이에 담아주던 주인의 남다른 정이 아니었을까? 물은 나눠주기도 하고 건네받기도 한다. 나눔에 인색해서도 안 되며, 받아들임을 주저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각박하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현명하고 의연한 판단의 몫이다. 썩어 냄새나는 물을 받아 마시고는 고통과 절망적인 삶을 살 수도 있고, 맑고 깨끗한 물을 얻어먹은 뒤 생기와 의욕을 경험 할 때도 있다. 나의 우물을 들여다본다. 지난날 맑고 깨끗한 내 우물을 위해 노력하고, 나눔에 인색하고, 고갈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이제 내 우물에도 좀 더 큰 두레박 하나 걸쳐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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