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서산서원(西山書院)

서산서원은 안동시내에서 남안동 나들목 옆 일직서 3분 거리에 있으며, 일직면사무소에서 조금 떨어진 일직면 원리 175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의 안동은 벼슬이나 과거등제보다 대쪽 같은 지조와 나라사랑·학행에 솔선수범했던 선비를 최고로 여겼다. 서산서원에 배향된 목은 이색과 수은 이홍조의 꿋꿋하고, 청렴한 선비정신과 학문수양은 후대에 오랫동안 정신적 사표가 되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에 있는 서원이다. 1771년(영조 47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詞)를 세웠고,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0년 사림의 공의로 복설하고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이색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를 종향하였다. 서원에서는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1983년 경북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구조
서원은 뒤로 가면서 경사가 있는 지형에 앉아 있는데,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가 대칭으로 위치하고 정면으로는 강당이 마주한다. 강당 뒤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나오고 그 안쪽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영역 우측으로 놓인 건물은 전사청이다.

◇사당
숭덕사(崇德詞)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고 측면에는 풍혈판을 붙였다. 각각의 칸마다 쌍여닫이문으로 출입문을 만들고, 측면의 벽 아래 부분에는 화재예방을 위하여 기와편으로 문양을 넣으면서 반담을 하였다. 사당영역으로의 진입은 내삼문 이외에 전사청 쪽으로 나 있는 일각문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강당
명교당(明敎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3칸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는 통칸의 방을 연결하였다. 마루 전면에는 사분합들어열개문을, 후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방들은 전면에는 쌍여닫이문으로 하고 측면의 칸마다 외여닫이세살문으로 꾸몄다. 강당은 2007년 지붕을 들어내고 보수공사를 하였다.

◇동재·서재
동재,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정면에서 보아 좌측의 2칸은 뒤에는 방으로 앞에는 툇마루로 꾸몄으며, 우측은 마루방이다. 방들은 통칸으로 전면과 마루 쪽 모두 쌍여닫이문을 내었고, 마루방은 후면은 벽으로 막혀있지만 전면은 개방되어 있다. 측면으로는 판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했다. 동·서재가 놓은 대지의 고저 차이로 마루방은 누마루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동재는 강수재(講修齋), 서재는 육영재(育英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기타
전사청은 사당영역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이다. 좌측은 광, 우측은 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내부공간의 성격에 맞게 출입문도 좌측은 판문으로 우측은 외여닫이세실문이다.
외삼문은 창도문(倡道門)이라는 현판이 달려있으며, 3칸 규모의 솟을대문 형식으로 단청을 하였다. 내삼문은 3칸의 평대문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된 목은영정과 ‘목은문집(牧隱文集)’ 등 고문헌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배향인물

◇고려 후기의 문신,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충숙왕 15년∼태조 5년, 본관은 한산(韓山).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영해(寧海)출생으로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조부는 이자성(李自成)이고 부친은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의 딸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14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348년(충목왕 4년)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년)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 1년)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예문응교(典理正·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7년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년)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년)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祭享)된다. 

◇조선 중기문신이자 의병장,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1595-1660)
선조 28년∼현종 1년, 본관은 한산(漢山). 자는 여곽(汝廓), 호는 수은(睡隱). 1595년(선조 28년) 전라도(全羅道) 함열(咸悅)출생이다. 조부는 이대형(李大馨), 부친은 찰방을 지낸 해산(海山) 이문영(李文英), 어머니는 풍산류씨(豊山柳氏)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딸이다.
10본가는 경성(京城) 낙선방(樂善坊,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인데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할머니 남궁씨(南宮氏)의 고향에서 잠시 살았던 때 태어난 것. 4세에 아버지를 잃고, 6세 때는 형 연천공(漣川公)에게 보내졌으며, 8세 되던 해에는 모친을 따라 외가인 안동 하회에 가서 외조부 서애 류성룡에게 글을 익혔다. 이후 13세부터는 막내 외숙인 수암(修巖) 류진에게 본격적으로 배우며 학문과 덕행을 익혀 나갔다.
이후 과거 공부로 한양에 올라왔으나 이이첨(李爾瞻) 일파가 국권을 농단한 채 폐모론을 주장함으로써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삼강이 끊어져가는구나!”라고 탄식하고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다시 안동으로 내려와 빙계서원(氷溪書院, 현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소재)에서 자연과 서책을 벗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인조반정 이후 몇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한양에서 치르는 성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43세 때 병자호란이 터져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안동 인사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서둘러 의병을 이끌고 길을 재촉하는 도중 참판 전식(全湜)이 영남의병대장이 되어 문경고을에 머물고 있음을 듣고 문경으로 달려갔다. 함께 군사를 모의하고 의병을 격려하고서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을 서두를 즈음 적에게 항복하여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1638년(인조 16년) 영남 의병대장이었던 전식의 천거로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과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회인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고을의 악습을 없애고 몸소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1646년(인조 24년) 당쟁으로 세상이 들끓자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집안의 곡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노자로 쌀 두어 말만을 전대 속에 담고 홀연히 안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후 번다한 세상사의 굴레를 벗어나 산수를 소요하며 물고기와 새들을 벗하며 여생을 유유자적하였다. 1656년(효종 7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60년 향년 66세로 진보(珍寶)의 방전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홍조는 경상도 안동부 일직현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자리를 잡아 수은공파(睡隱公派, 일명 안동소호리파)의 시조가 되어 후손들이 안동에서 번창하게 되었다. 현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등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남긴 후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문집으로 ‘수은집(睡隱集)’이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안동시 선산(善山)에 있으며, 일직면 원리에 있는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목은 이색의 일화
고려 말, 일찍이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에 유학을 해 과거에 급제하고 그곳에서 벼슬까지 하여 널리 알려진 터에 아들 목은까지 원나라에 가서 급제를 하니 그 명성은 원나라 전국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목은이 원나라에 들어가 향시와 성시에 모두 장원급제해 수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뒤 한림원 검토관 학사벼슬에 임명되어 원나라 조정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 재상의 딸이 목은에게 연정을 품고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소녀는 이 나라 재상의 외동딸로서 방년 18세의 규수이옵니다. 이번에 목은 선생께서 장원급제 하였으나 이 나라 조정 신료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도 1위 자리를 이 나라 선비에게 내어주고 2위로 내려앉은 내막을 이 소녀 잘 알고 있으며 의분을 참지 못 하였나이다. 불행히도 천하 제1의 명예를 탈취 당했사오나 천하 제일의 미녀와 천하 제일의 부귀를 얻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소녀의 부모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이오니 속히 회답을 주시옵소서.”
요즘말로 프로포즈 청혼인 셈이었다. 목은은 이미 고려에 아내가 있어 정중히 거절했다. 이 사실이 북경에 알려지자 목은은 화제의 주인공이 되어 원나라 젊은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었다.
원나라 선비들이 목은을 공연히 미워하여 당시 북경 문단을 우지좌지 하던 조수, 염복, 구양헌이 목은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북경의 요정으로 초청하여 일류문사 명기들과 글 시합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으레 술자리가 벌어지면 시를 지어주고 화답하는 것이 그 당시 선비들의 일상이었으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이란 조그만 나라에서 부자간에 과거급제를 한 것은 원나라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니 얼마나 글을 잘 하는지 은근히 글 시합을 하자는 속셈이었다,
구양헌이 사관으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종이를 펴더니 持盃入海曰海大(지배입해왈 해대)라 쓰고 싱긋 웃고 나서 이색(李穡)에게 댓구를 채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하는 짓이로구나 생각되어 마음이 조금은 상했지만 그냥 꾹 참고 坐井觀天曰 天小(좌정관천왈 천소)라고 거침없이 써버렸다.
구양헌이 쓴 글귀는 고려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달팽이 같은 너희가 달팽이 껍질 같은 술잔을 들고 바다에 처음 뛰어들 때는 중국이 큰 줄 몰랐다가 보니 어떠냐? 였다.
이에 대한 댓구로 너희들은 우물에서 자란 개구리 모양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하늘이 작은 줄만 아는 불상한 사람들이다.
구양헌이 약이 올라 또 다음과 같은 글로써 이색을 모욕하였다. 獸蹄鳥賊之徒交於中國(수제조적지도교어중국)이라 썼다. 이 뜻은 조수(鳥獸:새와 짐승)들이 이제는 중국에 교재하게 되었지 라는 뜻 이었다
이색은 피식 웃고서 댓구를 이렇게 적었다, 鷄鳴狗吠之聲達于四隣(게명구폐지성달우사린) 이 뜻은 너희들 수작은 닭과 개짓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로 통쾌한 댓구였다.
그 자리에는 중국 선비들뿐만 아니라 멀리 인도 등에서 온 한문을 아는 나라의 사절이 다 모여 있는 자리였다. 참석자 모두 혀를 내둘렀다. 분위기를 파악한 조수가 이젠 이색을 치켜세웠다.
이 한림(이색)은 소문대로 천재이다. 이 한림과 재주를 겨누다가는 망신만 당할 뿐이다. 이 한림을 장원으로 뽑지 않은 것이 우리의 수치다고 하면서.
중국 선비들은 이색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술상을 다시 차려 밤새도록 즐겼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최범서가 쓴 ‘야사로 본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수은 이홍조의 일화
수은 이홍조 (1595~1660)가 조상 대대로 벼슬살이하며 수백 년 살아오던 한양을 등지고 외가인 안동에 내려와 자리를 잡은 후 4대가 지나서야 처음 사마방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청렴하게 벼슬생활로 일관하고 출세에는 전혀 뜻이 없었던 수은의 삶을 보아 아마도 후손들의 생활이 새 고향 안동에서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을 듯 보인다. 수은공의 일화를 보면 수은이 얼마나 돈이나 권력과 담을 쌓고 살았던지 알 수 있다. 
한 번은선대로부터 재산과 노비들을 조금 상속받았다. 그런데 과부가 되어 혼자 계신 형수의 생활을 걱정해형수 댁으로 모두 보내 드렸다. 수은의 아내 영양남씨는 그 재산과 노비들 중 반만이라도 남겨서 어려운 생활에 보태자고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또한 회인현감으로 재직 중에 귀하게 키운 딸의 혼인을 맞게 되었는데, 털끝만치도 고을에 폐를 끼치지 않아 간신히 경대와 단장하는 기구 등을 어떻게 몇 개 마련하고 나니 출가할 딸의 장물이 하나도 없었다. 
영양남씨가 딸의 결혼 때문에 탄식하며 근심하자 수은은 웃으며, “우리의 도가 진실로 이러한 것이니 무얼 그리 탄식할 게 있겠소.”라며 오히려 가난한 삶을 당연히 여겼다. 
현감을 지낸지 3년이 지났어도 부임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옷이 낡고 때가 묻어 보기가 민망했는데, 수은의 친구들은 그러한 지나침을 병들어 그런 줄로 여길 뿐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하니, 참으로 고지식하고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또한 재종형제였던 휘기 조호암 공이 선친이신 휘 현영창곡공에 이어 2대째 재상자리에 있었지만 전혀 그 집에 발도 들여 놓지 않았다. 이런 대나무같이 곧은 성격을 가진 고지식한 분이 집안의 가장이었으니 그 식솔들의 형편과 가정경제가 어떠하였겠는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남들은 양반이란 신분, 나아가 사또라는 벼슬을 내세워 힘없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돈을 뜯어내며 재산을 착복하고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수은 이홍조는 홀로 외롭게 참 선비의 지조를 지키며 바른길을 걸었다. 
1646년 (인조 24년) 수은이 52세 때 세상에 당쟁이 들끓자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집안의 곡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노자로 쌀 두어 말을 전대 속에 담고 수은과 식솔은 홀연히 안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은은 젊은 시절 향시에 여러 차례 입격한 후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세상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먼지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초야에 묻혀 이름 없는 선비로 여생을 보내기를 여망하였다. 
수은의 올곧은 생활이 삶의 표상이 되어 안동문중은 지역사회에서 절의와 지조를 지키는 참 선비의 문중으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사대부 집안으로 자리 잡았다. 재력과 권력에 전혀 아부하며 굴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도덕을 지킨 수은 이홍조의 삶은 오늘날 황금만능주의사회에 살면서 돈에 노예가 되며 권력에 구걸하고 불의와 쉽사리 결탁하려는우리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한국국학진흥원편·경상북도학술총서(10)안동의지명유래·안동민속박믈관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자문위원>
한학자·목천 이희특,동화작가 김일광,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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