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수필가

흘러간 옛 것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그림이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사유가 많이 요구되는 시대의 변화로 공동체 정신이 무너져 더불어 공유하던 우리들이라는 마을 집단의 공동 행사가 사라지고 이웃의 개념도 희미해졌다. 예식장에서 시간에 쫓기면서 책장 넘기듯이 진행되는 결혼식 축의금액이 인격이 되고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결혼식에 불참이라도 하게 되면 혼주와의 관계도 서먹해지는 불편함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청첩장이 세금 고지서 같은 부담감들 강요당하는 축하객이 되어 좋은 주말을 이리저리 뛰어다녀 본 경험들을 했으리라.

유년시절 동네 축제 같았던 잔칫날의 흔적이 생각난다. 누구 집에 혼인 날짜가 잡히면 온 동네가 분주해진다. 잔치규모에 따라 집집마다 음식물 준비에 들어간다. 누구는 농주(막걸리)를, 또 누구는 감채(식혜)를 배당 받아 잔칫날 납품할 수 있도록 준비를 분주하게 진행한다. 잔칫날이 되면 개인적인 볼일을 뒤로 미루고 잔칫집에 올인, 마을 공동체나 문중에서 갖고 있는 음식물을 담을 집기들을 대여해 오고 마당에 가리개를 하고 멍석을 깔아놓고 마당 한켠에는 솥들을 내걸고 잘 건조된 장작을 땔감으로 했다. 가스나 석유곤로가 대중화되기 전이나 번거로움이 많았지만 땔감에만 의존해야 했다. 약간 건조된 물가자미를 쪄 내고 개복치나 문어를 삶아내고 전들을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들기름을 바른 후에 잔 연기들을 마셔가며 작업해야 했지만 누구 하나 짜증내는 이 없었다. 잔치 전날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잔치 당일에는 국수를 삶아 소쿠리에 마름을 해 놓고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릇에 담아 국물을 담고 고명을 올려 내어놓았다.

음식물의 총괄 본부 같은 곳은 도판장이라 하여 접근성이 좋은 부엌이나 창고 같은 곳에 자리해 놓고 솜씨 좋은 젊은 엄마들이 칼질하여 배식해놓으면 상을 나르는 사람들이 챙겨 질서 있는 배식 동선으로 쉴 새 없이 드나들고 동네 똥개들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나 주인과 눈이 마주쳐 고기머리나 꼬리 자투리를 던져 주면 냉큼 받아먹기도 하고 눈치 빠른 동네 아이들도 도판 주변을 맴돌며 요령껏 먹거리를 챙겨 먹을 수 있는 인심을 내는 곳이기도 했다. 근래 예식장에서 허겁지겁 쫓기듯 식사를 하고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조급함은 어디에도 없고 하루 종일 술주정으로 노닥거려도 허물이 되지 않는 그날들의 여유로움이 기억난다. 그 시절 그곳에서 어른이었던 분들은 이제 모두 유명을 달리했겠지만 도판 앞을 얼쩡거리며 식탐을 하던 그 소년 중에 한명이었던 나도 이제는 황혼이다. 느림의 미학이 존재하던 그 시절들을 어찌 잊으랴.

연지곤지 곱던 그 날의 신부도 주름살 가득한 늙은 노인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일몰이 되고 신방이 꾸며져 촛불 앞에 마주 앉아 어쩔 줄 몰라 할 신혼 방을 엿보려고 젊은 새댁들의 악의 없는 궁금함에 창호지 방문에 구멍이 송송 뚫리고 기분 좋은 숙덕거림에 신랑 신부는 혼비백산 촛불을 후 불어 꺼버렸던 그 날의 신랑들도 할아버지가 되어 추억을 노래하리라.

잔치 다음날 신랑 신부의 멋쩍음을 배려해 줄 방법으로 새 신랑 다루기를 집안의 젊은 장정들의 수다스러움이 가득한 허풍과 함께 새 신랑은 혼쭐이 나고 장모님에게 구원을 요청해 아껴둔 새 음식과 술이 나오고 마당에는 이웃들이 모여 들어 전날 먹고 남은 음식을 나눠 먹는 미덕이 있었다. 이러한 선의의 미풍양속도 간소하라는 미명 아래 흔적없이 사라지고 형제 같은 이웃도 사라졌다.

“심성이 오염되지 않았던 그 시절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대답해 줄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추억거리 많았던 우리들의 시절은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자위하고 싶을 뿐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노래한다. 그래서 시장 먹거리 골목에서 잔칫집 국수에 그 날의 향수를 찾으려 하는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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