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도계서원(道溪書院)

 

국도5호선을 따라서 영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안동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북후면 도촌리가 나온다. 안동권씨 집성촌 마을 우측 편 끝에 남서향으로 도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비지정문화재로 있다가 2009년 안동시가 시지정문화재로 선정했다. 안동권씨는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여 천년 이상 안동에 세거해온 안동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은 대대로 안동에 살던 토족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이다.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로로 권씨(權氏) 성을 하사받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보(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으며 후삼국 통일 후 태사(太師)의 작위를 받았다. 후손들이 권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다◇연혁
경북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358번지에 잇는 서원이다. 1687년(숙종 13년) 옥봉(玉峯) 권위(權暐)를 제향하기 위해 세웠다. 지방 유림의 공동 결의에 따라 도계정사(道溪精舍)에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 권위가 거처하던 만대헌(晩對軒) 옛터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991년 후손들이 사당인 모현사(慕賢詞)와 강당인 명륜당(道溪)을 새로 수리하고, 동재인 상의재(尙毅齋)와 홍도문(弘道門), 고직사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부속건물인 만대헌이 경북 유형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조
경내의 건물로는 강당인 명륜당, 동재인 상의재, 사당인 묘현사, 외삼문인 홍도문, 내삼문, 고직사, 만대헌으로 이루어져 있다. 1687년(숙종 13년)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년) 훼철되었던 것을 1928년에 복원하였다. 1991년 사당과 강당의 보수가 있었고, 동재, 외삼문, 고직사는 신축한 것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명륜당이 마주하고, 상의재가 우측에 자리한다. 서재는 없고 약간 빗겨서 고직사가 있다. 사당 영역은 좌측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대가 높아지면서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어 보이는 것이 가장 상위의 공간임을 강조하는데 적절하게 구성되었다. 강당의 후면은 자연스런 경사를 후원으로 꾸몄고, 경내의 여기저기에 석물로 장식된 것이 눈에 띄는 특징이다.
만대헌은 다른 건물들과는 강당이나 사당과는 다른 배향을 하고 있으며, 집이 높게 기단 위에 올라 있어 원경에서 가장 먼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이다. 서원의 경내를 구획하는 담장의 모습이 지형에 따라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어 주변의 경관을 잘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
사당인 모현사는 옥봉 권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이다. 건물에는 단청을 했으며 각각의 출입문에는 태극문양을 그려넣었다. 사당의 앞에는 향나무를 심었으며, 내삼문 이외에 사당 우측 담장에 일각문을 내어 부속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당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는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으로 가운데 두 칸에 마루를 깔고 좌우에 방을 들였다. 입면의 구성은 방과 마루 모두 문을 달아 폐쇄적인 형식을 취하고, 마루의 내부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마루의 전면에는 출입이 가능한 높이의 두짝여닫이문이 달려 있다. 방들은 전면에 아궁이를 두어 난방을 하고, 측면으로 한짝여닫이문을 내었다.
건물의 기단이 동재에 비하여 높게 조성이 되어 있고, 마당에서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을 마루칸 앞에다 만들고 섬돌을 놓았다. 외삼문에서 강당으로 가는 중간에는 식재를 하지 않고 잔디를 깔고 괴석을 두어 조경을 하고 있다. 강당의 후면으로도 나무를 심지 않고 자연스런 경사지를 따라 담장까지 잔디밭으로 꾸몄다.

◇동재
동재에 해단하는 상의재는 외삼문을 들어와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건물을 정면에서 보면 중앙 칸에는 두짝여닫이문을 달고, 좌우방으로 출입하는 문은 한짝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내부에도 마루로 꾸며진 공간은 없으며, 전면에 툇마루나 쪽마루도 이어내지 않은 간략한 평면으로 이루어진 집이다. 그러나 서원 경내에 서재가 없으므로 동재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직사
서원 경내의 좌측 아래에 위치한 고직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은 슬레이트 기와로 얹었다. 평면은 가운데 부엌이 있는 까치구멍집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에 ‘ㅡ’자집으로 된 부속채를 따로 두고 있다. 부속채는 광과 외양간 등으로 구성된 정면 6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만대헌
이 건물은 옥봉 권위(玉峰 權暐)(1552∼1626)선생이 40세 되던 해인 1591년(선조 24년)에 수학과 강학을 위해 건립한 가옥이다. 현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도계서원(道溪書院)내에 위치하고 있다.
집은 ‘ㄱ’자형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마루 부분에도 문을 달아 외부로는 매우 폐쇄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붕의 모양도 전면에서 보면 우측은 팔작지붕, 돌출되어 있는 누마루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만들었다. 집의 기단을 매우 높게 조성하였으며, 방의 전면으로는 누마루 형식의 공간을 구성하고 아래에 아궁이를 놓았다.
집의 평면이 ‘ㄱ’자 모양으로 된 것이 바로 방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누마루 때문이다. 강당, 사당 등과는 좌향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어 다른 영역과는 독립된 성격을 보인다.
정면 어간에는 양개 띠장널문을, 정면의 우측칸과 우측면 그리고 후면에는 각 간마다 양개 띠창널창을 설치하였는데, 어칸 중앙의 문틀을 제외한 5개소에는 각각 가운데설주를 세웠으며, 문틀과 기둥사이에는 모두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어칸 정면의 띠장널문과 우측면의 띠장널창 상부에는 세살을 끼웠는데, 이는 폐쇄적 공간에서의 채광을 고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막돌허튼층쌓기하여 2단으로 구성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주두 상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도리와 장혀만 걸었다. 5량가인데 대량 위에는 키 작은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얹었으며, 그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높이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하였다. 대공의 몸에는 소로를 끼웠으며 소로위에는 다시 첨차와 소로를 놓아 장혀와 종도리를 얹었다. 우측간에는 충량을 걸었으며 상부에는 우물반자와 선자연을 걸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형성하였으나, 좌측 전면의 온돌방 상부부분의 지붕은 박공을 이루었다. 구조수법이나 가운데설주 등이 건립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기타
외삼문인 홍도문은 솟을대문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의 문 좌우에는 광을 들였다. 문에 다양한 장식적 요소들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내삼문은 정면 3칸의 평대문 형식으로 단청을 하고 각 칸의 문마다 태극문양을 넣었다.

■배향인물

◇조선 중기의 학자, 권위(1552-1630)
명종 7년∼인조 8년. 자는 숙회(叔晦)이고, 호는 옥봉(玉峯)이며, 안동 도촌리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조부는 권의이고, 부친은 권심행(權審行)이며, 어머니는 신천강씨(信川康氏) 강희철(康希哲)의 딸이다. 학봉 김성일, 유일재 김언기, 월천 조목 등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해 배웠으며, 송소 권우와 근시재 김해 등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절차탁마하였다. 1572년(선조 5년) 동당초시(東堂初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601년(선조 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겼다. 이때 중국의 사신 고천준(顧天俊)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심희수가 공조판서로서 관반(館伴)을 맡게 되어 사신을 맞이하는 예법을 공에게 의지하였다. 심희수는 공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매양 “지위가 덕에 못 미친다.”라고 탄식하였다. 1602년(선조 35년)에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나아갔다. 1604년(선조 37년)에 강진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호조좌랑과 형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1605년(선조 38년)에 예조좌랑이 되어 과거시험장에 함부로 들어온 자를 조사하였는데, 모두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였으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1616년(광해군 8년)에 동경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지위가 낮고 한가한 직책인지라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그곳에 나아가 후생들을 가르치는 여가에 가까운 사람과 더불어 산과 바다를 유람하면서 회포를 읊어 <동경일록>을 남겼다. 1630년(인조 8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는 <옥봉집>이 전해지는데, 모두 4권 2책으로 1847년(헌종 13년)자손들에 의하여 편집·간행되었으며, 권말에 유치명(柳致明)의 발문이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한 선비, 옥봉(玉峰) 권위(權暐)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후중(厚重)하고 근면하여 일찍이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학덕을 익히고자 백운정(白雲亭)에 머물면서 학봉에게서 주자서(朱子書)를 배웠다.
선생은 21세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장원(壯元)하였으며 28세에 선고 생원공이 현감의 참소를 입어 한양으로 이끌려 가게 되니 선생이 수행하여 애매한 사정을 호소하여 생원공이 풀려났으나 병을 얻어 객사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은 3년간 시묘를 하였으며 또 효성이 지극하여 생원공 생전에 임하에 있을 때 육십리 길을 매일 밤 천렵하여 어버이 반찬을 보내기 십여 년 지속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 동안 거려(居廬)하니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생원공 일로 벼슬에 뜻이 없었다가 연로한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50세의 나이로 선조 34년(1601년) 과거에 응시하여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곧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겼다. 明國의 사신 고천준(顧天俊)과 심희수(沈喜壽) 판서(判書)가 접반사로 있을 때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심판서(沈判書, 후날 영의정)가 선생의 지위가 인품에 못 미친다 하였다. 선생은 이어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 해미(海美), 강진현감(康津縣監) 수성찰방을 거쳤다. 해미현감 재임 시 청렴 검소하며 공명정대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다. 광해 10년 예조와 형조정랑(正郞)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으나 1616년(광해군 8년)동경교수(東京敎授)를 제수하니 부임하여 유생(儒生)의 훈육에 전념하였으며 유생들에게 “선비는 스스로 도학(道學)의 공부가 있으니 과거(科擧)에 집착하여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로 훈계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자기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결국 어진(仁)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명나라 陳모가 안동에 진을 쳤을 때 그 막료 주원조(朱元兆, 호는 鶴林)가 선생을 한번 보고 마음으로 열복하여 친교를 맺으니 휘하 장수들이 선생을 존경하였다. 선생은 인조(仁祖) 8년(1630년) 고종(考終)하니 향년(享年) 79세로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 풍산읍 노리)에 배위(配位)와 함께 합폄하였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배위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니 문성공(文成公 휘 초명裕, 안향(安珦)의 후손이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맏이는 극재(克載)로 선무랑(宣務朗)이며 둘째는 극기(克己)로 통덕랑(通德郞)이다. 선생은 퇴계(退溪)선생을 마음으로 모시고 그 학문(學文)정신을 흠모하였으며 옥봉문집( 玉峰文集)을 남기고 일록(日錄)을 저술하였으며 시(詩)119수와 서(書) 행장(行狀)등이 있다. 형제간 우애가 깊어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모두 형제에 나누어 주고 척박(瘠薄)한 전답만을 취하였다. 인품이 근후하여 평생 구차한 행실을 하지 않고 재물에 탐함이 없었으며 몸가짐을 엄숙하게 하여 누구에게나 소홀히 하지 아니하였다.
만대헌은 선생이 40세에 건립하여 제생(諸生)을 강학(講學)하던 곳이며 주원조(朱元兆)와 화답한 시문(詩文)이 있다. 선생은 시문(詩文)이 출중하여 문장을 모두가 전송(傳誦)하였다.

◇옥봉(玉峯) 권위(權暐)의 시 한편

骨窟十韻(골굴십운) - 東都作 -

험한 길을 지나 그윽한 경치 찾아(涉險尋幽勝)
아득히 관문 하나를 넘어왔노라(悠悠越一關)
빽빽한 숲 아래에 길은 희미하고(逕微䕺樹下)
어지러운 바위 사이 말은 넘어지네(馬躓亂巖間)
바위에 하늘이 만든 굴이 있나니(有石天生穴)
어느 해에 교묘히 깎아내었나(何年巧斲剜)
벼랑을 따라 그대로 집을 얽으니(緣厓仍立架)
그 형세가 또한 산을 바라보네(面勢且看山)
작은 방은 겨우 몸 하나 부칠 정도고(斗室纔容膝)
밭으로 난 창은 내다보고 웃을 정도네(田窓可啓顔)
서까래를 엮어서 조도와 연결하고(結椽通鳥道)
바위를 파내어 원숭이처럼 매달리네(鑿石費猿攀)
이름 쓴 현판은 삼면에 걸려 있고(名額開三面)
단청은 사방을 한결같이 비추도다(丹靑煥一般)
거하는 스님은 마음이 절로 편안하고(居僧心自逸)
지나는 손님은 뜻이 외려 한가하네(過客意猶閒)
지팡이 짚고서 번거로이 올라가서(扶杖煩登陟)
시를 읊어 하늘이 아낀 비경을 드러내는데(吟詩破秘慳)
비낀 해가 그림 속의 풍경 같아서(斜陽如畫裏)
오래도록 앉은 채 돌아갈 줄 모르네(坐久不知還)

-《옥봉집(玉峯集)》: 동도(東都)는 경주(慶州)를 가리키며, 골굴사를 주제로 쓴 시.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한국국학진흥원편
옥봉집(玉峯集)·국립중앙도서관

<자문위원>
한학자·목천 이희특,동화작가 김일광,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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