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고작, 동전 다섯 개의 무게 21g. 죽은 사람의 몸에서 풀려나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닌다는 그 무게는 사랑의 무게일까. 생명의 무게일까. 영혼의 무게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거운 어른이든, 가벼운 아이든 죽는 순간 몸무게 21g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우리는 노심초사 한다.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고매한 정신이고 영혼이지 비루한 육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엾은 몸은 21g의 무게가 수시로 부리는 변덕과, 횡포를 말없이 감내하면서 무거운 삶을 지탱해내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른한 오후, 어디선가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가 나직이 들려온다. 노래가사는 마치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진 지난날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쏜살처럼, 꿈결처럼 사라져버린 길고 긴 시간의 말미에서 묻게 되는 의미심장한 물음처럼 들린다.

시간만큼 상대적인 것이 또 있을까. 젊은 시절은 마디고 더뎠는데, 지금은 바쁘다는 것이 능력의 척도인 줄만 알고 추락하는 물체처럼 가속도가 붙어 어느 듯 나의 인생시계는 만추다.
정작 바빠서 바쁘기도 하고, 마음이 조급해 일에 끌려 다니느라 바쁘기도 하다. 한 순간도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다보니 늘 바쁘고, 늘 불안하고, 늘 누군가를 미워하고, 늘 화가 나 있고, 늘 전투 자세다. 욕심과 불안, 분노와 미움과 아집이 나를 지배하도록 그대로 두고 되는대로 산다. 삶에 찌들어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중년의 삶이 아닐까.

친구p의 하루는 바쁘다 못해 숨이 턱에 찬다. 얼마 전 요양병원에서 종합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온 시어머니에 하루의 초점은 멈추어버렸다. 여차하면 달려갈 준비태세를 갖추고 멀리 갈 수도, 오랜 시간 느긋하게 여유로울 수도 없다. 어렵게 친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지켜보는 이가 더 조급하다. 미리 전화로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수저를 든다.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병원 전화에 노심초사한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며느리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부부의 찬거리, 먹거리도 담당한다. 짬을 내 본인의 작은 일터로 달려가 쌓인 일도 처리 한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전투태세다. 아프거나 바쁘기만 한 일상에 오금이 저릴 정도다.

다른 친구k는 p보다 더 바쁘다. 셋집 살림을 철인처럼 해내고 있다. 척추부상으로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는 친정어머니의 집과, 홀로 지내시는 시아버지의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순회한다. 멀리 있는 형제들을 대신해 가깝게 사는 친구가 오롯이 아픈 친정 부모님을 밀착 돌본다. 시아버지의 상황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연로하시고 달리 돌 볼이 없는 처지라 그 역시 방심할 수가 없다. 마치 일만하는 말처럼 셋집의 기둥에 자신의 고삐를 묶고 바쁘고 고되게 채찍질만 한다. 계단 앞 주춤하던 그녀의 무릎 관절이 내는 바람소리가 서글프게 들린다.

그리고 몸보다 마음이 더 바쁜 친구 y도 있다. 둥지를 떠날 줄 모르는 새끼들 때문이다. 직장 다니는 마흔이 가까운 미혼인 딸 치다꺼리와, 5년차 취업준비생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늘 동동거린다. 설상가상 작년에 결혼한 막내딸이 직장을 옮겨오면서 경제적인 문제로 함께 살고 있다. 아직 제 둥지를 찾아 날아가지 못한 새끼들로 인해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좁다 못해 살부비듯 뒤엉켜 지낸다.

걱정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다투는 시어머니도, 거동이 불편한 노년의 시아버지도, 친정어머니 병수발 들다 먼저 몸져누우신 친정아버지도, 혼기를 놓치고 나이 들어가는 딸도, 직장을 얻지 못해 아직도 학원가를 맴도는 아들도, 비싼 집값에 결혼해도 둥지를 장만할 수 없는 막내딸의 딱한 처지도 생각할수록 서글프다. 자식과 부모라는 의무를 다하느라 남아 있는 에너지와 노후 자금으로 비축해둔 작은 여유 돈 마저 탈탈 털어 쓰고 있다. 돌아보면 할머니의 등 뒤에 있던 우리들의 어머니가 그랬듯, 지금은 그 어머니의 등 뒤에서 우리가 하고 있다. 중년에 느끼는 일상의 무게가 참으로 무겁다. 마치 원죄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디 지난 삶이 허투루 살았던 삶이던가. 어제는 모두 전생 같은 것, 아무리 힘들어도 잠깐 지나가는 것, 싸우지 말고 항상 다독거리며 사는 것, 다독거리지 못하면 휘젓지 말아야 하는 것,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중년이다. 삶의 보석 같은 얻음이다. 그 같은 얻음으로 돌아보면 평생의 애씀이, 내가 하고 있는 지금의 힘든 일들이, 어떻게든 뜻과 보람을 더해보려는 노력으로 채워져 있어 중년의 고된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돌연 척추에 힘이 들어간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극한값은 무엇일까. 갈등하던 내 안의 어떤 불필요한 기름기 같은 게 빠지는 느낌이다. 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그림자 안에 봄날 어느 하루의 내가 있고 세상이 있다. 진짜 바라보고 반추해야 할 세상의 목전이 이곳, 21g의 무게로 견디는 바로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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