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내 오월의 달력이 그득하다. 살 부비며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공존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있다. 배려와 이해가 있고, 양보와 대화가 만나는 풍요로운 달이다. 스승이 계시고, 부처님이 함께 하시니 영혼의 곳간까지 푸르고 맑다. 부부의 날이 있는가 하면 근로자의 날도 있다. 큰아이의 생일이 있는 달이고,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의 제사도 있어 생(生)과 사(死)도 공존한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날들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해 사람이 만든 날들이다. 사람이 근본인 사회. 오월은 그 근본의 중심에서 영혼의 향기를 건져 올려 정신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달이고, 사랑의 달이다.

불과 얼마 전. 생기라고는 찾을 길 없어보이던 나뭇가지 끝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는 나무가 조금씩 붉은색을 띠면서 추운겨울을 이겨냈다고 속삭였다. 며칠 사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애틋한 매화가 얼굴을 내밀고 나무들은 겨울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잎의 호위도 없이 등장했던 진달래, 벚꽃, 개나리가 지고 봄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무르익었다. 푸르고 맑은 오월이다.

새뜻한 오월. 창밖의 초록햇살이 유난히 맑다. 천지가 온통 흥성거리니 오감으로 봄을 만끽하고 있다. 행복한 철부지들의 웃음이 꽃가루처럼 흩날린다. 온갖 꽃내음, 애절한 새들의 연가에 빠져든다. 저마다의 오월이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꽃잎이 지고, 목숨이 지고, 사랑이 진 아픈 달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오월은 참회로 거울삼아 ‘나답게’ 살려고 다시 마음 잡아보는 달이기도 하다.

살아생전, 평생을 부처님께 기대셨던 내 어머님은 늘 "이웃에 마음을 열고 살라"며 내내 경계해 주셨다. 또한 ‘나답게’를 한시도 손에서 놓지 말라고도 하셨다. 늘 마주치며 사는 이웃이 나를 일깨우는 선지식이요. 지덕체 중에서도 덕육(德育)이 곧 바른길의 근본임을 강조하셨다. ‘나답게’라는 것이 곧 없음이요. 없는 그대로가 있는 것임을 깨닫는 것. 그래서 꼭 가지고 싶은 것은 절반만 가지고, 혹여 내게 잘못한 사람도 모른척해 주고, 남을 당하게 하기보다 내가 당해 주고, 그리 살면 내게 웃는 날이 많을 것이라고. 그래서 양심이라는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하게 하셨다. 어버이 날 때문일까. 해마다 오월이면, 어머니를 생각하고 실천하지 못한 죄책감과 북받치는 그리움에 당혹스러워진다.

인생의 봄에도 새 생명의 잉태는 축복이다. 축복 받지 못할 탄생이란 없다. 건강하게 태어난 큰 아이와 달리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병원신세를 졌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버티는 어린 것을 보며 나는 죄인이 되어 안절부절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달고 나왔으면 됐다"고 하셨다.

그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짝을 지어와 가족이 되겠다고 할 때도 불퉁해 하는 내게 "사지 멀쩡하고 건강해 일할 수 있으면 됐다"고 일축하셨다.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란 다양하다. 그저 주어진 자기 몫의 삶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내는 것에 정해진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삶의 끝맺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 그때 과연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 늙음이나 죽음일까. 아니다. 하루하루를 땀 흘린 만큼 보람차도록 애쓰며 살지 못했을 때 오는 후회다.

아이들이 각자의 둥지를 보답고 잘 사는가 싶다가도 ‘사니, 못사니’ 하면서 흔들리고 방황 할 때도 어머니는 "큰 병 얻어 병원에 누워있지 않고, 감옥에 가 앉아있지 않으니 됐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가끔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혹은 고맙고 혹은 후회스럽다고 여긴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가장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대체로 세상일에 한탄하지 않고 참회로 거울삼으며 산다. 나도 일상에서 사람다움에 늘 성실하려 했고, 그중에서도 어머님의 지혜를 내 그릇에다 옮겨 채우며 살기를 염원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염원만 요원할 뿐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녹슨 삶에 찌들어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 올곧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영혼이 탁해졌다고 꾸중이라도 하실까. 이웃에 항상 반가운 웃음으로, 항상 미안한 자세로, 항상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일상을 가꾸며 살지 못했다고 야단이라도 치실까. 오월의 달력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허리를 곧게 펴게 된다. 하여, 나 또한 정신이 맑아지고 더불어 ‘사람답게, 나답게’ 사는 지혜를 얻어 늘 푸른 여년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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