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漢書)》‘동방삭전편(東方朔傳扁)’에 각득기소(各得其所)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행한다는 뜻으로 각자 그 능력이나 적성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어 맡은 바를 다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같은 성어로 각적기소(各適其所)가 있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일이다. 한무제(漢武帝)의 누이 융려공주(隆慮公主)의 아들 소평군(昭平君)이 한무제의 딸 이안공주(夷安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병으로 위독하던 융려공주(隆慮公主)가 황금 1,000근과 1,000만전의 돈을 가지고 소평군(昭平君)을 위해 나중에 죽을 죄(死罪)를 짓게 될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속죄해 달라고 청했다. 무제가 이를 허락했다.

융려공주(隆慮公主)가 죽고 난 뒤, 소평군(昭平君)은 날로 교만해져서 술에 취해 이안공주의 주부(主傅: 보모)를 죽여서 내관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공주의 아들이라는 연유로 인해서 정위(廷尉; 사법 담당 관리)가 한무제에게 그 죄를 결정해 달라고 주청하였다. 한무제의 좌우에 있는 자들마다 모두 소평군을 위해서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속죄금을 내자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이 있습니다.”이에 무제가 말했다.

“내 여동생이 나이 들어 이 아들 하나만을 두었고, 죽을 때는 나에게 부탁까지 했었는데.” 그리고서는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법령이란 선제(先帝)께서 만드신 것이오. 동생에 대한 동정 때문에 선제의 법령을 어긴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조(高祖)의 사당에 들어갈 수 있겠소. 또는 아래로는 만백성을 대할 수가 없게 될 것이오.” 하고 정위의 주청을 재가했다. 그리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니 좌우의 신하들도 모두 슬퍼했다.

이때 동방삭이 앞으로 나아가 축수(祝壽)하며 말했다.

“신이 듣건대, 성왕(聖王)께서 정사를 베푸시매 상을 줌에는 원수도 꺼리지 아니하고, 죄 지은 자를 죽임에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도 골라내지 않는다 했습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한 곳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무리를 짓지 아니하니 왕의 길은 넓고도 넓도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것은 오제(五帝)께서 소중히 여기신 법이며, 삼왕(三王)도 하기 어려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행하셨으니 이로써 사해(四海)의 만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맡은 바를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이니(是以四海之內 元元之民 各得其所) 천하를 위해서는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신 동방삭은 술잔을 받들어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며 만세의 목숨을 누리시기 축원합니다.

동방삭은 전한의 학자로 널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설에 달했으며 무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해학ㆍ변설(辯舌)ㆍ풍간(諷諫)으로 군주의 잘못을 고쳐나가게 했다. 방사(方士)로서 알려졌고, 속설에 태백성(太白星)의 정기(精氣)를 타서 장수하였다 하여 삼천갑자(三遷甲子)동방삭이라 부른다.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학생은 학교, 농부는 들판, 군인은 군대, 성직자는 교회나 사찰, 공무원은 관공서, 국회의원은 국회 등. 그런데 요즘은 그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목사가 길거리나 광장에 나가 연설을 하고, 성직자인 신부가 데모에 앞장서고, 스님이 길바닥에 엎드려 삼배일보로 교통을 마비시키고, 국회의원은 국회 밖에서 국민을 선동한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각자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망각하고 있는 사회지도층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동방삭이 말한 각득기소(各得其所)의 고사를 생각하며,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잘난 척 하지 말고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자. 각자 맡은 곳에서 제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조용히 제 역할을 다하는 책임있는 사회지도층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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