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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산책] 6월의 밥상윤혜주 수필가
   
어느새 더워졌다. 한 낮의 햇살이 만만치 않다. 계절은 단 한 번도 순서를 어기지 않고 우리에게 온다. 갔던 길이 아니면 가지도 않는다. 봄을 짝사랑한 겨울도, 겨울을 사랑했지만 가을의 방해로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한 여름도, 끝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갈 길을 재촉 한다. 봄이 아무리 여름을 사랑한다 해도 여름은 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봄은 사라지고 없다. 벌써 지치는지 식구들이 처져 있다. 수저의 움직임도 맥없이 더뎌졌다. 입맛이 없는지 부실한 밥상을 물리면서 매운탕 타령을 한다.

우리에게는 스치듯, 혹은 진하게 조우했던 모든 인연이 있었다. 그 인연은 사라졌거나 사라져간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의미는 또 다시 찾아온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소중한 것들이나 잊혔던 것들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소소한 것들을 불러낸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그 분의 음식이 생각난다.

이른 아침. 빡빡! 우물가 돌확에 보리쌀 씻는 소리가 들렸다. 큼큼! 한참 후 구수하고 누르스름한 햇보리밥 냄새가 나고 마침내 쓱! 쓱! 뚝배기에 된장 보리밥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투박한 뚝배기 속 된장찌개를 서로 뜨느라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도 요란했다. 물큰한 강된장에 텃밭의 풋고추 한 양재기도 개 눈 감추듯 사라졌다. 마치 설익은 수박처럼 풋풋했던 풋고추의 그 맛을 어찌 잊으랴. 저녁 어스름. 이집 저집 온 가족이 마당 평상에 둘러 앉아 햇보리로 지은 보리밥 쌈을 먹었다. 허옇게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 아이도, 다리에 힘이 빠진 어른도 힘들게 넘어온 보리 고개를 자축이라도 하듯 볼이 터져라 쌈을 싸 입에 밀어 넣었다. 제비새끼처럼 입 벌리고 있는 어린것들의 입에 어머니는 보자기 쌈을 넣어주느라 바빴다. 거끌거끌한 찐 호박잎, 향긋하면서 고소한 깻잎, 야들야들하게 삶은 달짝지근한 양배추 잎 등 텃밭의 푸성귀 잎은 죄다 ‘밥보자기 쌈’이었다. 농익어도 기세등등하게 하늘 향해 꼿꼿하게 고개 숙이지 않는 보리의 생명력 탓일까. 잃어버린 기력을 보충해야할 밥상에 보리밥 한 뚝배기에 어머니의 손맛까지 더해진 쌈이면 충분했다.

강을 가까이 하고 사는 건 삶의 덤이었다. 본격적으로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 마을 강가 갈대숲으로 숭어가 돌아왔다. 먼 바다에서 강 하구로 돌아온 숭어는 무리를 지어 아침햇살에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아름다운 자태로 유영 했다. 강가에는 초망 든 사람들로 부산했고 우끈우끈 던지는 이들의 팔뚝에 힘이 솟았다. 아버지가 숭어 아가리에 부드러운 갈대를 끼워 주렁주렁 매달아 오면 어머니는 살로만 잘게 다진 할아버지의 회와, 뼈째 다진 아버지의 회를 각각 따로 쳤다. 그리고 치아가 부실한 할아버지를 위해 남은 대가리와 뼈로 푹 우려낸 국물에 호박잎을 찢어 넣고 된장으로 엷게 간을 한 탕도 끓여 냈다. 심심하면서도 그윽한 맛이 어우러진 깊은 맛이었다. 남은 숭어는 소금으로 간을 해 바람에 말렸다. 꾸덕해진 숭어는 토막 내 파, 고추, 마늘에 쌀뜨물을 부어 푹 끓이고 젖국으로 간을 해 먹었다. 담백한 국물맛과 쫄깃한 식감은 늦봄 최고의 맛이라는 우럭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밍밍한 것 같아도 먹을수록 시원한 끝 맛은 일품이었다. 6월의 밥상 앞에서 생각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그 분의 음식이다.

내 모든 것을 남이 해 주는 세상이다. 특히 식생활이 가장 두드러진 부문이다. 하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 가 지금 우리들의 식생활 모습이다. 쌀, 간장, 된장, 설탕 등의 요리재료 소비는 급감했다. 반면 배달음식이나 간편식의 소비는 크게 늘었다는 통계다. 편의점 도시락이 집 밥을 대신한 지 오래고 시켜 먹는 게 무슨 현대인의 도라도 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 ‘집밥시대’ 의 끝을 공언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시장 좌판대위에 제철 우럭이 싱싱하다. 얼룩덜룩하고 비교적 밝은 색을 띠는 걸 보니 자연산이 틀림없어 보인다. 실한 놈 두어 마리를 사와 대파와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미나리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향긋하지만 칼칼한 매운탕을 끓인다. 된장으로 살짝 버무린 배춧잎 무침, 구뜰한 묵은 지, 다문다문 검은콩이 박힌 고슬고슬한 밥, 담백하지만 쫄깃하고 찰진 식감과 씹을수록 올라오는 우럭의 단맛에 식구들의 수저가 바빠진다. 오늘 저녁은 우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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