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석 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단원

우연히 기사를 검색하다가 클래식 전공자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았다. 내용은 “아프고, 불안해요”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클래식 전공자 3명중 1명은 반복된 연습으로 통증을 격고, 5명중 2명은 연주를 하면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는 조사 결과였다. 클래식 전공자의 절반에 가까운 비율이 최근 1년간 우울감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현악전공자들의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를 비추어 봐도 대중들 앞에서의 무대 공포증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았고, 특히 전공을 담당하는 교수님 앞에서의 연주는 긴장감의 강도가 엄청나서 연주를 망치는 일이 흔하다. 선배들의 조언은 연습을 많이 하면 저절로 되니 늘 연습량을 늘리라고 했다. 물론 크게 효과가 있지는 않다.

사실 교향악단의 전문 연주자가 되어도 무대에서의 긴장감은 늘 있었던 것 같다. 무대공포증을 극복했다기보다는 긴장감이 없으면 집중이 잘 안되어 오히려 연주를 잘못하는 것 같다.

첼로를 처음 시작하고 첼로가 어떤 악기인지 궁금해서 당시 레코드 판매점에 가서 테이프를 추천을 받았는데 영국의 유명 첼리스트 쟈크린 뒤프레의 엘가 첼로협주곡이 수록된 테이프를 사서 집에서 들었을 때 너무 감동을 받아서 도대체 이 여류첼리스트는 어떻게 이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하여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첼로 소리를 듣고, 첼로를 하고 싶다고 졸라서 네 살 때 자기키보다 더 큰 첼로를 선물 받았다.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하였다. 1959년 16세가 되던 해에 뒤프레의 명반이 된 엘가 첼로협주곡을 연주하고 녹음을 하였다. 당시 뒤프레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독지가가 뒤프레에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선물한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라고 할 정도로 뒤프레의 연주는 열정적이었다.

연주자로서 엄청난 성공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한 남자가 등장했다. 유태인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렘보임 이었다. 사실 바렘보임은 아주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지만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뒤프레에게 접근하여 결혼까지 하게 된다. 물론 뒤프레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하나 개인적인 느낌은 뒤프레의 유명세를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바렌보임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다. 둘의 결혼으로 셀 수 없는 연주 스케줄과 음반작업이 이루어졌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불행이 찾아왔다. 뒤프레는 피로감을 많이 느꼈으며 눈이 침침할 때가 많아지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이상해 졌으며 자주 넘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증세를 남편인 바렌보임에게 이야기 했으나 당시 뒤프레의 결혼으로 연주자와 지휘자로서 유명세를 쌓아가고 있던 중이라 뒤프레의 연주가 필요했다. 그는 아내에게 피곤하여 정신력이 약해졌다고 하였다. 그녀도 이러한 증상이 자신의 정신 탓이라 생각하여 일주일에 5번씩 정신과 치료를 다녔다고한다.

그러던 중 그녀의 연주는 점점 이상해졌고 연주에 대한 비평가들의 악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어느 날은 넘어져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어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주 때는 활을 놓쳐버릴 지경이 되자 병원에 갔을 때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때 그녀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정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병으로 인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뒤프레는 음악 교육에 힘을 쏟는다. 1978년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 후 그녀의 악기는 대만계 미국 첼리스트 요요마에게 물려준다. 이후 뒤프레는 점점 두 다리, 팔, 몸 전체가 마비되었고, 사물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남편 바렌보임은 스케줄이 많다는 이유로 연락도 하지 않았고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대로 한 결혼, 천재로서 연주만 하고 살았던 그녀에 곁에는 사실 아무도 없었다. 슬프게도 가족들도 그녀가 돈을 주지 않으면 오지 않았다. 그녀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지만 첼로와 보낸 시간에 대해서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 필요할 때마다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거의 어떤 의미인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첼로는 생명이 없는 대상이지만 나는 첼로에게 나의 슬픔과 문제들을 모두 다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첼로 연주를 통해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알 수는 없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천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지…….

뒤프레는 1987년 남편 바레보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남편인 바렌보임은 그녀가 죽은 후에 한 번도 그녀의 무덤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존경하는 첼리스트 쟈크린 뒤프레는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녀의 음악은 음반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고교시절 뒤프레라는 첼리스트를 만난 것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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