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우리는 문화가 산업이 되는 현상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정신이 결여된 문화는 작위적인 문화이자 생명력을 상실한 문화다. 근래 우리 사회의 문제를 걱정하는 뜻있는 분들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이 가정의 해체와 가족 간의 불화현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모색에서는 공동체의 가치와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가정과 사회, 어디서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던 포항 유교문화의 산실 향교를 찾아 선인의 정신을 배우고, 가족의 소중함과 현재 우리의 역할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 향교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정책적으로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의 배치에 따라 전면에 배향공간이, 후면에 강학공간이 위치하는 전묘후학(前廟後學)과 전면에 강학공간이 자리 잡고 후면에 배향공간이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시문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이 주요 교육과정을 이룬다.

◇ 관내 향교 소재지
-흥해향교 : 북구 흥해읍 동해대로 1530번길 1-3
-청하향교 : 북구 청하면 청하로 233번길 16-5
-연일향교 : 남구 유동길 48번길 5
-장기향교 : 남구 장기면 읍성길 92

◇개별 향교 소개
▶ 흥해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1호, 2012. 10. 22 지정)

「신증동국여지승람」(권22)에서 군(郡)의 서쪽 1리에 있었다고 하는 흥해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연혁에 관한 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창건연대 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정진백(鄭鎭伯 : 1867~1924)의 문집인 「석농집(石儂集)」의 <흥해향교 중수기(興海鄕校 重修記)>에서 “본 군 향교의 설치는 건국으로부터 창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이에 향교가 창건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 흥해 지역의 연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흥해는 본래 퇴화군(退火郡)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전국적 군현 개편에 즈음하여 의창군(義昌郡)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초에 현재의 이름인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쳐졌다.

그 후 현종 9년(1018년)에 경주의 속읍이 된 후 명종 때 감무가 설치됨으로써 일읍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공민왕 때에 접어들어 국사 배천희(裵千熙)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된 후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일읍으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조선 태조때 지방 향교를 전국적으로 창설할 무렵에 흥해향교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정진백이 본 군 향교 설치는 「자건국이창(自建國而創)」이라 하였던 것이다.

현재 흥해향교에는 조선후기에 작성된 「석전의궤(釋奠儀軌)」가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향교 중수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가 있는데, 우선 정조 즉위년(1776년) 12월 24일의 <대성전 중수시고유문(大成殿 重修時告由文)>과 이듬해 3월 21일의 <환안고유문(還安告由文)>이 실려 있다. 이 때 대성전의 퇴락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졌고 순조 3년(1803년 윤 2월) 동ㆍ서무의 퇴락으로 인한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이안제(移安祭)가 행해졌고, 4월 3일 환안제(還安祭)를 행하였다. 이때의 군수는 이득강(李得江)이다. 또 순조 30년(1830년) 대성전에 비가 새어 기와를 다시 이었으며, 이때 역시 이안제(3월 15일)와 환안제(3월 20일)가 각기 거행되었다고 한다.

「석농집(石儂集)」에 의하면 흥해향교는 1920년 정전 및 문루의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일향의 장보(章甫)가 각자 의연금을 내어 교토(校土)에 보태어 기백원을 만들어 향교를 일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흥해향교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7번 국도변 야산에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대성전, 서무, 동무, 명륜당, 서재, 동재, 수복실, 태화루 등이 있었으며 총 99칸의 규모였으나 6ㆍ25 한국전쟁 때 대성전과 동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불타 버리고 없었던 것을 1953년 명륜과 수복실을 신축하고 뒤이어 동ㆍ서무를 복원하였으며, 1990년대에 명륜당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 태화루를 복원하였다.

▲대성전(大成殿)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전내(殿內)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놓았고, 정면에 문얼굴을 내어 각 칸에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을 달았는데 널은 통재(通才)를 사용하였다. 기둥머리에는 외일출목(外一出目) 이익공(二翼工)으로 구성되었으며, 살미의 형상은 끝을 날카롭게 하여 활달하게 뻗고 있다. 그 익공 살미 위에는 운공(雲工)장식으로 초각(草刻)하였는데 보머리가 그대로 돌출되는 것에 비하면 힘찬 구조적 강건함은 덜하나, 보다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효과는 뛰어나다. 첨차는 위치에 따라 주심(柱心)첨차와 행공(行工)첨차로 구분되는데, 주심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깍은 교두형이고 행공 첨차는 하부를 초각하였다. 창 방위에는 당초문(唐草文)과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화반(花盤)을 올려놓았다. 가구(架構)의 구성은 이고주(二高柱) 오량으로 하였으며, 세장(細長)한 듯한 대량(大樑)위에 중대공(中臺工)을 보아지와 첨차로 구성하여 종량(宗樑)을 받고 있으며 종량 위에는 파련대공(坡蓮臺工)을 세워 마룻도리를 받치고 있다.

※ 대성전이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殿閣)을 말한다. 공자를 중앙에 하고 안자, 증자 등 5성(聖)을 모시고 민손, 염경 등 10철(哲)과 공자의 70제자를 위시한 한ㆍ중 양국의 현인 111위를 배향했다.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등이다. 요약하면 공자묘(孔子廟),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의 정전(正殿)이다.
▲명륜당(明倫堂)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홑처마로 된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었으나 1990년에 옛 건물을 헐고 원래의 자리에서 앞으로 옮겨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건립하였으며, 평면형식은 정면 중앙 3칸을 마루로 꾸미고, 양측 칸을 반 칸 가량 뒤로 물려 온돌방을 꾸몄으며, 5량가(樑架)의 초익공(初翼工)건물로 가구(架構)하였다.

▲동무(東廡)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며, 장대석을 외벌대로 쌓은 낮은 기단위에 원주(圓柱)를 세우고 정면은 각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마루를 깔았다.

▲서무(西廡)
3량가(樑架)의 굴도리집으로 1975년에 번와 및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서무(西廡)는 1953년에 동무(東廡)와 같은 형태로 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다.

▶ 청하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8호 1997. 9. 29 지정)

청하향교는 태조 7년(1398년) 금정리(金井里 : 현 서정 1리)에 창건되었고, 숙종 39년(1713년)에 현감 노세환(盧世煥)이 현청이 있는 덕성리(德城里)에 이건공사를 착수하였으며, 후임 현감 류적(柳迪)을 거쳐 김세우(金世遇) 현감 때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2층 천화루(闡化樓), 신삼문(神三門), 열호재(悅乎齋) 등을 완성하여 1716년(숙종 42년)에 준공하였다.

다시 1843년(헌종 9년)에 류도종(柳道宗) 현감 시에 중수하고, 1923년(癸亥年)에 직원 김병(金炳)과 향림(鄕林)이 수리하였다.

청하향교는 소설위(小設位)이며 과거에는 춘추(春秋)향제를 지냈으나 근래부터 8월 상정일(上丁日)에만 지내며 인근 고을의 34문중이 참여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 서편 열호재(悅乎齋)는 70여 년 전 화재로 소실되었고, 천화루(闡化樓)는 한국전쟁 때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파손된 것을 1964년 평가건(平假建)으로 중건하였고 연무정(練武亭)도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청하향교는 한국전쟁 때 향교 뒤 성지(城地) 나무숲에 공산군의 탱크부대가 주둔해 있어서 미군의 공격목표가 되어 피해를 많이 입게 되었다.

현재 향교 뜰에 연무정비 반쪽과 현감 임택고열호재창건비, 현감 노세환흥학비(盧世煥興學碑)가 그리고 향교 앞에 한국전쟁 이후 새로 만든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 연일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호, 1985. 8. 5 지정)

조선 태조(太祖) 7년(1398년)에 현재 포항시 남구 대송면 장흥동(長興洞)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연혁에 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숙종(肅宗) 때 대송면 성좌동에 중창(重創)하여 고종(高宗) 8년(1871년) 현감 원우상(元禹常)에 의하여 현 위치로 이건 되었다. 일제(日帝) 때 명륜학교로 사용된 바 있고 1983년 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포항시에 편입되어 보존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중국의 5성현(五聖賢)과 송조의 2성현 우리나라 현철(賢哲) 18분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 상정일(上丁日)에 향제(享祭)를 올리고 있다. 특히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ㆍ겹처마의 집으로 주심포계(柱心包系) 외일출목(外一出目)의 조선후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다. 부속 건물로 내삼문, 외삼문 및 명륜당, 중문, 포사 등이 있다.

▶ 장기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7호, 1997. 9. 29 지정)

장기향교는 조선 태조(太祖) 7년(1398년)에 현의 남쪽 2리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3년(1600년)에 중건하고, 정조 9년(1785년) 지방의 교학을 부흥하기 위해 현감 황익진(黃翼振 : 1784~1785) 때 마현행단(馬峴杏檀 구석곡 : 현 장기초등학교 동편)에 이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문경(徐文慶)ㆍ서극인(徐克仁)ㆍ이대임(李大任)ㆍ이눌(李訥) 등이 향교에 봉안해 오던 위패를 용암석굴(龍岩石窟)에 권안(權安)시키고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건물은 소실되었으나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고, 덕계(德溪) 임재화(林再華)는 향교를 이건할 때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희사하여 향교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 1931년에 군수 김영수(金永銖)가 향사(鄕士)들과 함께 읍성(邑城)내에 있던 구 객관(客館)을 수리하여 명륜당(明倫堂)을 만들고 대성전(大成殿)을 새로 건립하여 위패를 옮겨 안치하였다.

장기향교는 소평위며, 인근 55문중이 매년 춘추 2회(2월, 8월 상정일) 향제를 지내다가, 최근부터는 8월 상정일에만 지내고 있다.

현재 향교에는 대성전ㆍ명륜당ㆍ신삼문ㆍ동재ㆍ장경각ㆍ대문 등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다. 향교 앞의 하마비(下馬碑)는 근래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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