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톡톡! 못을 친다. 단단한 시멘트 옹벽에 작은 장도리 하나 들고 시름을 한다. 들어가는가 싶다가도 틱! 하니 구부러져 빠져버린다. 차마 버리기 아까워 굽어진 못을 뉘어서 대가리를 잡고 편다. 그러나 구부러진 못은 다시 한 번 쓰이는 호강을 누리지 못했다. 결국 손가락만 찧고 다시 구부러져 튕겨 오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득 이토록 못에 저항하는 보이지 않는 벽속의 작은 구멍 속이 궁금해진다.

아이를 처음 만난 건 모교인 여중에 일일교사로 갔을 때였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핏기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차마 놓을 수없는 그 무언가를 붙잡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 힘없이 작은 소리로 차렷, 경례를 외치던 보조개가 예쁜 반장아이였다. 순간 나는 그 아이에게서 한 마리 쇠똥구리를 봤다. 집채만 한 소똥을 굴리며 언덕을 힘들게 오르는 쇠똥구리. 일곱 번 놓치고 다시 온 힘을 다하여 소똥을 뭉쳐보지만 또 언덕 아래로 놓쳐버리고 지나온 길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쇠똥구리의 눈빛이 저리했으리라. 그러나 쇠똥구리가 다시 힘을 내 온몸으로 여덟 번 굴리며 언덕을 오르는 것은 쇠똥구리에겐 소똥은 신성한 생계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사십년이라는 세대 차이를 극복하고 아이들에게 근접하는 게 급선무였다.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깊숙한 내면의 세계를 살짝 들여다보고 싶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진짜 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적으라며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반응은 의외였다. 중학교 이학년의 아이들이 쉽게 납득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는데도 모두가 진지하게 종이를 채워냈다.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미 주어진 환경과 처해진 상황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는 중압감도 아이들의 내면 깊숙이 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예쁘지 않는 외모도 적이었다. 안 맞는 친구로 인해 괴로워해야하는 자신의 마음도 진짜 적이었다. 싸우고 굴복시켜 막무가내로 당신들의 뜻대로 키워내려는 부모님 세대와의 갈등도 아이들은 진짜 적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파릇한 새싹 같은 희망의 존재들이 아니던가. 나름대로의 다양한 적을 꺼내놓고 진지하게 토로(吐露)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할머니라고 적어 낸 아이가 있었다. 바로 그 아이였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아이에겐 얼마 전에 출소한 어머니가 있었다. 무슨 연유로 오랫동안 어머니가 교도소 생활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이유로 할머니는 눈에 불을 켜고 모녀의 재회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러나 넘치는 할머니의 사랑과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질긴 혈육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리며 몹시 보고 싶어 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이가 가는 길엔 어디든 따라나섰고 딸을 보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며느리를 매몰차게 내쳤다. 애지중지 손녀 딸 하나 인생의 전부로 목을 매는 할머니와, 범법자가 되었다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애태우는 어머니. 그 사이에서 아이는 오랫동안 감춰왔던 분노와 억압된 욕망으로 인해 섭식장애라는 몹쓸 병을 앓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치료는 받고 있지만 별 차도가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친구들 또한 사내아이처럼 활달하고 담대함도 있는 밝은 아이였다며 지금의 상황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인간관계에서 마음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나 그 대상이 혈육인 경우엔 아픔은 배가 된다. 아직은 따뜻한 온기와 충분한 자양분이 필요해 보이는 자라는 나무들이다. 구부러진 틈새에 박힌 구부러진 못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삐걱거리다 무너지는 아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함께 맞아주는 비다. 함께 울어주는 공감의 눈물이다. 그래서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그 감정을 스스로 다루어 내도록 돕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더불어 내면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어른들의 진솔한 인생의 조언도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에 갈수록 무덤덤해지는 각박한 세상이다. 우산 없이 오롯이 혼자 비를 맞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못이 들어갈 구멍 속을 살피는 것도, 반듯하게 설 수 있게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도, 마음을 담아 진솔하게 위로하는 것도 어른들의 몫이다. 그래서 일곱 번 놓치고도 다시 여덟 번 언덕을 오르는 쇠똥구리가 되어 지구를 굴리면서 올라가게 해야 한다. 누군가 ‘사랑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 이라 했다.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는 위로가 더 따뜻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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