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포항테크노파크 기업지원협력관

안톤 시나크를 교과서에서 만난 것은 이양하 선생의 말대로 하나의 운명이었다. 한 젊은 손에 어떤 책이 쥐어지느냐 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살아 있는 것들의 숙명인 슬픔에 대한 태도를 일찌감치 배운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오뉴월의 장례 행렬’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당시엔 그다지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아나는 기차’ ‘휴가의 마지막 날’이 슬픈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제목은 거의 ‘표준 전과’ 같아서 ‘기쁘게’ ‘화나게’ ‘귀찮게’ 하는 것들을 때때로 끄적거려 보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제 잘난 맛에 흠뻑 도취해 있는 정치인, 설교 시간 울리는 까똑 까똑 소리는 우리를 어떻게 어떻게 한다 식으로.

몇 년만인지 모를 포항 폭염이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들’을 뇌수 속에다 풀어 놓았다. 시도 때도 없이 쿵쿵거리는 윗집 발자국 소리, 다시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의 초점을 잃은 눈동자, 10년째 소식이 없는 경제 회복 뉴스를 기다리는 일, 오랜 가뭄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영구적 자동 기계(perpetuum mobile 페르페투움 모빌레)가 아닌 인간은 쉬어야 한다. 불멸하는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선물은 ‘유한’이다. 열정, 투지도 언젠가는 지쳐 끝을 보게 된다. 영웅심, 탐욕 혹은 불우한 환경이 우리를 얼마나 고단하게 하는지 겪어 본 사람은 안다. 다행히 이 모든 것은 또한 지나가리라.

지그문트 바우만은 ‘ 흔들리는’ 현대인들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아쉬워하고 있다.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고 관계를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학생은 공부가 본분이라든가 연예인은 노는 게 일이라는 말은 이제 갈라파고스 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화석이 되었다.

일 한 당신만 떠나라고 하는 것은 잔인하다. 젊은 혹은 아직도 늙지 않은 수 많은 ‘흰 손’들이 일 자리를 찾느라 검색하고 물어보고 문을 두드리는 과로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언젠가 ‘전업 주부가 한 게 뭐 있어 휴가 타령이냐’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수준의 발설을 한 적이 있다. 여지도 가차도 없이 무시무시한 징벌이 가해졌다. 이단 옆차기가 핵심인 매우 고난도 형벌이.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시지프의 신화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집안 일의 질림’에 어설프게 토를 달 아재들은 미리 유서를 써두는 게 좋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한강의 기적’호가 서서히 닻을 올리고 포항이 철강도시로 발돋움 할 즈음 포항제철소 ‘열연 비상’이 발효된다. 하루 콘크리트 700만 입방미터 타설은 당시 우리나라의 열악한 건설 기자재 수준에서는 피라미드 축조나 대수로 건설을 방불하는 가공할 목표였다. 차라리 영일만에 빠져 죽을지언정 지칠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둡고 괴로운 폭압의 밤을 걷어내는 민주화 투쟁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친다는 것은 쁘띠 부르주아들에게나 줘버려야 할 일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사라져 간 고귀한 희생들 덕분에 우리는 지친 일상을 끊어갈 여유를 갖는다. 재충전 뒤에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도전할 목표가 분명하고도 산적하다. 국민소득 3만불이라는 깔딱 고개를 넘어야 하고, POSCO 매출액 신장률을 웃도는 포항 경제 성장률을 실현하고, 문화와 예술의 품격 높은 도시를 창조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도 북한의 ICBM이 쿠바 앞바다에 떨어지기 전에. 다음 세대들 뇌리속에서 통일이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밤낮 없이 표밭을 누비는 후보자들도 인간일진데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공약’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가 산적해 있을수록 한번쯤 Reset 해 봐야 한다. 청산의 시스템이나 방법 그 자체가 적폐가 아닌지.

휴가 레시피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 북소리’가 두둥둥 들리는 에게해 미코노스를 소개하고, 쇼스타코비치는 7번 교향곡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추천한다. 읽을 거리와 풋풋한 고뇌를 마대자루에 담아 흑산도에서 젊은 여름을 보내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다산 정약용 코스프레로.

사랑하는 이를 위한 ‘피로 회복제 한마디’ 또한 휴가 필수품이다. “여보 나는 한번쯤 함께 살아 봤으면 했던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야” “아빠 괜찮아 내가 있잖아” 등 류승완 감독도 엄지척 할 Cool한 명대사. 길이 막혀 숨이 턱턱 막히는 차 안에서 때맞춰 날리는 “울 신랑 운전 솜씨 쏴라 있네. 짝짝짝 짜악 짝!” 그 한 마디에 바이칼 호수까지 운전할 수 있겠다. 셀린 디온의 ‘The Power of Love’를 열창하며.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 백석의 시편도 삶의 피로를 씻어준다. 태평양과 모래사장이 펼쳐진 한적한 동해안에서 ‘핸꺼펜콕’도 나쁘지 않다. 핸드폰 꺼버리고 펜션에 콕 틀어 박혀 도스토예프스키 5부작을 해치우는 느린 쉼 또한 자전거 국토 종단 못지 않은 고품격 휴가다.

어째 올 해는 포항 국제불빛 축제(7.26~7.30)를 보러 몰려올 지인들에게 고향 자랑 수다를 늘어놓는 여름을 보낼 것만 같다. 브라질과 미국의 불꽃 튀는 명승부에 시원한 수박이라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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