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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포은의 고향집이 아니라 관향 기념관이 건립되어야김희준 역사교사·동대해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충신의 표상이고 성리학의 연원이 된 포은 정몽주를 기념하는 서원을 조선 시대에 유림에서 세웠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에 드는 월사 이정귀는 포은의 관향에 오천서원, 영천 옛집에 임고서원, 개성 저택에 숭양서원이 있고, 용인의 묘소 앞에는 충렬서원을 세운다고 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포은이 영천 외가에서 태어나 오천의 친가에서 성장했다.’는 말이 포항 지역에 정설처럼 퍼지고 있다. 이 말은 과연 사실일까?
‘포은의 조부가 오천 청림리 촌집에서 포은 부친을 낳고 중간에 영천 우항리로 이사 갔다.’고 영천의 포은 부모 묘비에 나온다. 영일(오천) 정씨는 관향 오천에서 영천으로 포은 조부 때 옮겨 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포은이 우항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영천군읍지(1831), 서애 유성룡의 포은 연보, 도암 이재의 포은 묘지명 등에도 포은의 우항리 탄생을 명기했다. 포은 연보에는 영천 포은 구택(舊宅)의 포은 효자 정려문 밑에 효자비가 있다고 했다. 외가에서 관례를 올리지 않고, 외가에 정려문과 정려비를 세우지 않는다.

포은은 1401년에 복권되고 문충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영천 옛집과 개성 저택처럼 부친이 태어난 청림리 집은 포은을 모시는 사당이 되었다. 이 사당이 1588년 오천서원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탔다. 다행히 오천 사람 정광계(鄭光啓)가 영일향교의 5성 위패와 서원의 형양공 정습명, 문충공 정몽주 위패를 운제산 만장암의 굴에 피난시켰다. 임란 후 청림리 서원을 복구하기 전에 포은의 위패를 운제산 아래에 1601-1612년까지 12년간 모셨다. 영일현읍지(1832)에는 이 사당 터의 초석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사당이 있던 운제산 아래 골은 문충곡이라 했고, 문충곡 아래 촌락을 문충리라 불렀다. 그래서 ‘문충리에서 포은이 탄생했다.’, ‘문충곡에 포은이 거닐던 청렴대, 말 매던 바위, 말 오르던 바위가 있다.’고 하는 속설이 생겨난 것이다. 서원이 1659-1719년 사이에 원리로 옮겨간 뒤에 청림리 옛터엔 유허비각이 세워졌다.

포은이 영천과 더불어 관향인 오천을 자신의 뿌리가 서린 향리(鄕里)로 인식하고 당대인이 포은을 ‘정오천’이라 부르며, 행장에 영일현인이라고 하고, 영천 읍지에서 포은은 영천이 관향이 아니기에 ‘포은의 우항리 탄생 사실’을 ‘우거(寓居)’ 조에 싣고 포은 인물 정보는 관향인 영일현의 읍지에 자세하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오늘날, 관향을 생장지(生長地) 고향으로 오독(誤讀)하고, 기초 사료를 방치하고 속설을 근거로 ‘포은이 영천 외가에서 태어나서 문충리 친가에서 자랐다.’고 주장하는 말이 퍼지고 있다.
조선 시대 유림에서 포은의 관향에 오천서원과 유허비를 세운 것처럼, 오천에 ‘고향집(생가)’이 아니라 포은 ‘관향 기념관’이 세워져 향토사 교육과 관광의 뜻깊은 공간이 되기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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