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포항테크노파크 기업지원협력관

한 중국인의 죽음에 세계가 애도하고 있다.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인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으로 투옥과 사면을 반복하던 류샤오보가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다. 2010년 노벨 평화상 시상식의 그의 부재는 참담한 중국 인권 현실을 세상에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그가 있어야 할 의자에 팔 다리가 잘리고 수갑을 찬 애꾸눈의 “투명한” 팬더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에 주목한 이는 나 하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중국, 아니 중공만 아직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는 드높은 기개가 온 몸을 감싸고 있어 거인처럼 느껴진다. 인민 해방군 탱크를 온몸으로 막아 선 청년이 연상되는 류샤오보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한 번만이라도 해외에서 치료를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무형의 유류품이다.

그를 위해 나는 마스카니의 ‘카바렐리아 루스티카나’를 되풀이해서 들으며 그의 ‘저항’에 지지를 보낸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까지 들어도 개운치가 않아 벌떡 산책을 나가는 것 정도가 ‘인도적 죽음’에 대해 한반도 동남권 도시 소시민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분이 덜 풀린 신발장에다 대고 흉악범에게나 어울릴 욕설을 퍼부으며, (몇 주 전 그 모서리에 정수리를 찧어 피를 흘린 참사가 도저히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증오심을 담아 중공 정권에 발사할 ‘레이저’를 정확히 신발장 모서리에 내리 꽂고는 문을 나선다. 그래도 ‘먹먹함’ 이상의 어떤 감정이라도 들어야 국제 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글로벌 시민의식 소유자 반열에 끼이겠거니 하겠는데, ‘헛헛함’ 이상의 감정이 들지 않는 메마른 자신에게 더욱 분노하게 된다.

제4세대 방사광 가속기 뒤안으로 나 있는 2.5리 페이브먼트를 물놀이용 그물 신발로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측백이나 아카시아, 모과나무나 감나무처럼 생긴 수목, 들국화를 닮은 아담한 화초들이 말을 걸어 오지만 일일이 대꾸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참새, 비둘기, 까치, 뻐꾸기들의 합창도 평소와 달리 불협화음이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듣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드문 드문 떨어진 쓰레기도 마뜩잖다. 주워 볼까 하다가 ‘동네 인심 얻어 뭐라도 하려나 보다’라는 구설수에 휘말리는 게 떠올라 허걱 하고 손을 거두어 들인다.

문득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이 내뱉은 말이 어느 날 산책로를 걸으며 떠오른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 하는가 /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 옹졸하고 비겁한 나는 얼마나 작으냐 / 모래야 바람아 풀아 나는 얼마나 작으냐’. 김수영은 저항을 실천한 진보주의 시인이다. ‘거대한 뿌리’ ‘그 방을 생각하며’ ‘풀’ 등은 우리가 무엇에 분노해야 할 것인지 역설하고 있다.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최고 단계가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는 죽음이다. 일제나 민주화 투쟁 시기에는 불붙는 정열, 거룩한 분노가 많았다. 자신의 배를 가르고, 폭탄을 던지고, 적의 우두머리를 처단하고, 붓을 꺾는 지사, 투사, 열사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매국, 반역, 굴종의 꿀맛을 향유하는 부류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늘 있다.

사회 현실 참여(engagement, 앙가주망)는 문학의 숙명이라 하겠다. 다루는 대상이 세상이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광복 이후엔 ‘친일’로, 6.25 전쟁을 겪고 나서는 ‘공산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로, 그러고는 ‘독재에 대한 항거’로 진영을 갈랐다. 미미한 독서량 탓에 나는 ‘보수’와 ‘진보’ 양대 진영의 대표 작가로 이문열과 김수영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우리 고장에서도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들을 곧잘 듣게 된다. 포항엔 남구와 북구 국회의원과 시 행정의 최고 수반이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시 의원 41명 중 66%인 27명이 같은 당 소속이고, 도 의원 8명도 정치에 오래 종사한 친구 얘기로는 전원이 자유한국당이라고 한다. 민주주의 근간인 다양성 측면에서 ‘100%’란 놀라운 일이다. 아무튼 포항은 보수 지역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 해 말 이문열의 ‘보수여 죽어라’는 글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대표적 보수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죽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죽어라’는 명령형에 반발심이 든다는 핑계거리도 들춰냈다. 보수를 대표하는 작가 스스로 솔선하여 ‘죽자 혹은 죽읍시다’라는 제안형이었더라면 보수지역 시민으로서 나도 결연히 ‘죽어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동참했을 것이다. 기꺼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 반년이 넘도록 이문열의 보수가 죽었다는 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적폐를 청산하는 김수영의 진보 진영도 ‘조그마한 잔가지’에 화를 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북아 중심 도시 포항 건설을 위한 100년 대계」 같은 ‘거대한 담론’에 주목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울고 싶은 하늘은 뺨을 때려주는 이가 없는지 그저 울먹이고만 있을 뿐이다. ‘잭의 콩나무’처럼 팔을 뻗어 공중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물들 등짝을 확 떼밀어 주고 싶다. ‘빨리 내려가서 인간의 슬픔을 씻어 주라’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슬픔을, 타 죽어가는 농작물 앞에서의 오열을,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씻지 못한 까만 아이들 얼굴의 얼룩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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