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가 오는 2019년부터 초등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용어 이해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 300자 이내에서 한자를 표기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자 교육계가 이를 반대하며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초등학교 한자교육은 해방 이후 1965년까지는 4-6학년 국어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했고, 그 후, 1969년까지는 국한문 혼용 방식으로 이뤄졌으나 70년 이후부터 전면 금지 되어왔다.

한자교육을 일찍 배워야한다는 주장에는 한자 문화권에 속한 주변국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어휘력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필요하지 않다는 시각에는 수업에 부담이 되고, 학부모에게는 사교육비가 늘 뿐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말하기를 언어를 사유(思惟)의 집이라고 한다. 이는 언어가 있어야 생각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그만큼 언어가 우리 인간에게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인류는 언어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한 국가 혹은 한 민족의 정체성과 결부되어 논의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독일어로 된 성경을 만들고자 했던 루터는 언어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직접 접할 수 없는 일반 민중이 몸소 하느님 말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길을 트고자 했고 그의 노력은 결국 종교 개혁의 물꼬를 열었던 것이다.

16세기에 살았던 루터에 이어 18, 19세기를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저술을 통해서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독일어’에서 찾는다. 당시 일상적 독일어에 침투한 외국어가 자기 민족의 고유성과 정신을 앗아간다고 그는 경고했던 것이다.

약간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국가와 민족 그리고 언어와의 관계는 이렇게 형성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한글 말살 정책도 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틴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선 세종대왕은 루터보다 언어와 삶의 관계를 깊이 깨달은 인물이다. 언어는 문자와 말로 구성된다. 이 둘이 일치되지 않을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세종의 훈민정음 어지(御旨)에 잘 드러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말의 뿌리라고 하는 한자교육론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한자 교육의 대치점은 언어생활의 수월성에 있다. 한자 교육론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조기에 실시해야 하고, 그래야만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데 초점이 모아진다. 아울러 그렇게 됐을 때 국가 경쟁력이 확보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영어 조기 교육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언어 교육의 효과는 적어도 한 세대를 거쳐야만 확인될 수 있는 어려운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반성해 볼 필요성이 더욱 커진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