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감옥」을 읽고

"문 저편에 뭐가 있는지는 문을 열어 봐야만 알 수 있어.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것은 포기해야지. 왜냐하면 나머지 문들은 잠겨버리니까."


세상의 처음에는 삶의 문과 죽음의 문만이 존재한다. 인간의 삶 속에 수많은 선택도 결국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살면서 깨닫는다. 그리고 종국에는 단 하나의 문만 남게 되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예외 없이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고 말한다. 죽음은 본질적인 '나' 라는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 저편으로 가는 그 순간에 또 다른 한 생명은 같은 하나의 문턱을 넘어 삶의 이편으로 넘어온다.


어떤 사람이 외적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자유로운가?

신은 인간에게 빵 대신 자유 의지를 주었다고 한다. 자유 의지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힘으로서, 개인의 자유 의지만이 천국에 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수긍할 수 없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유 의지는 애당초 어디에도 없었다. 신이 만든 은총이라는 거짓말만 있었을 뿐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고 말한 예수의 말과는 달리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빵을 얻기 위해 힘들게 구걸하다가 자신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의 문을 다시 통과하여 삶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의지의 본질을 잘 파헤쳐 우리에게 허와 실을 낱낱이 보여주고, 이 세상의 통속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꿈의 논리를 제시한다."는 평을 받은 미하엘 엔데의 단편「자유의 감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제목에서 보여주는 역설 외에도 '인간의 본질은 인간 스스로 채워가는 존재', '나를 내버려 다오(let it be)'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 작품은 장님 인샬라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마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누구나 희망을 안고 살아가지만. 결국 모두가 늙어버려 남는 것은 없고 희망 역시 부질없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희망이나 꿈이 몇 개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하엘 엔데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살아가면서 가졌던 희망이 단순한 희망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의 단편 「길잡이의 전설」에서는 "진짜 예술가는 거짓말 도사가 돼야 한다. 자기가 하는 예술이 진짜 기적이라고 믿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처럼 신도 진짜 거짓말 도사여서 인간에게 거짓을 진실로 위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 어떻게 하면 인간의 존엄을 가장한 현실 속에서 「자유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자유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신이 준 자유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 원하는 자유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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