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포항테크노파크 기업지원협력관

진보 정권이 출범한 지 어느덧 석 달이 흘렀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조급해지지 말자고 스스로 암시를 걸고 있다. 설마하는 기대도 막연한 비판도 아직은 이르다.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한다.

내가 알기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누구 보다 크게 기여한 세력들이 386이다. 그 중에서도 1964년생 용띠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연도로는 83 학번이고 사정에 따라 82 또는 84 학번이기도 하다.

2002년 12월 선거 날 6시에 흘러나온 MBC 뉴스 아나운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당선이 확실시 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많은 386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 뭔가 제대로 하려나 하는 기대감을 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기대는 깨졌다. 언론과 검찰을 대하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고 노회한 기업인을 다룰 줄도 몰랐다. ‘닭장 차’ 넘어뜨리듯 밀어붙이면 통할 줄 알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무척 당황해 하는 것이다.

당시 마흔이 채 되기도 전에 마치 오랜 풍상을 견뎌 권력을 쟁취한 것 같은 ‘몽상적 성취감’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이제 50대 중반이 되어 ‘힘’을 잡은 쪽에 서게 되었다. 10여 년의 숙성기간을 거친 ‘586’들이 어떻게 변해 있을 지가 궁금하다. 시대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3권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먼저 배기찬의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이다. 같은 분야 서적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동북아시아의 균형 추’라는 외교 전략이 여기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반대 진영에서는 ‘나라가 힘이 없는데 무슨 균형 추가 된단 말이냐’ 라는 비판도 있었다. 동년배들 학문적 성취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고 있었지만 배기찬씨의 연구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를 통칭 ‘코리아’로 부르는 것은 혜안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누추한 역사들이 함께 따라 온다. 외적에 대응하지 못하고 백성을 곤경에 빠뜨리는 집권 계층의 파렴치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라는 명칭에는 뭔가 미래 한반도에 도래할 ‘한민족 통일 강대국’이 연상되어 미소를 머금게 된다.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을 두 세력으로 구분한 것은 대응 전략의 간소화라는 측면에서 유의미하다.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과 중국, 러시아 대륙세력의 접점이 지금의 휴전선이라는 지적은 그 양대 세력 ‘대리전 상황’을 환기시켜 준다.

같은 민족끼리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속히 다른 쪽으로 돌려야 한다. 북한 핵이 조작 결함으로 도쿄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견해가 있는데 오히려 북경이나 모스크바에 떨어질 확률 또한 낮지 않다. 발사대의 각도를 미세하게 틀어버리는 것은 지금의 ‘해킹’ 기술로도 가능할 것이다. 세계 최강 한국, 미국, 일본의 첨단 IT 기술이라면 날아가는 미사일 방향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영화를 많이 본 탓인가…)

다음으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다. 미국의 진보도 보수에게 맨날 져서 절치부심하던 시기가 있었다. 양당체제가 굳어진 미국 정치에는 중간이 없다. 진보의 당나귀가 아니면 보수의 코끼리가 권력을 잡는다. 깔끔하고 심플하다. 이기면 그만한 권력을 누리고 지면 깨끗이 박수치고 승복한다. 징징대거나 구질구질하지 않다. 보수를 이겨 보려는 오랜 연구 끝에 미국 진보가 내린 결론은 공화당 즉 ‘코끼리의 프레임에 함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 중에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한창 사임 압박을 받고 있을 때이다. TV에 나와 연설을 했는데 전국에다 대고 이렇게 외쳤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 여기게 되었다’는 내용은 지난 번 우리 대선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 나라는 이제 진보 정권이 탄생했으므로 이 책은 보수 세력이 읽어 볼 차례이다. 보수와 진보를 바꿔서 ‘당나귀는 생각하지 마’로.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진보세력이 여전히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책을 그대로 읽어 봐도 좋을 듯 하다.

중국에도 ‘코끼리’와 ‘당나귀’가 있을까. 도쿄 주재원 시절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서 ‘시진핑이 지고 개혁 세력인 리커창이 부상할 것’이라고 ‘헛다리’를 짚은 일이 있다. 일본 정가도 그렇게 보았다. 시진핑을 볼 때마다 그 ‘오보’를 뉘우치게 된다. 태자당 일각에서 시진핑 황제 체제까지 검토하는 모양인데 진보 성향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 이를 좌시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미국에서 10만 부 팔리고 우리 나라에서 그 열 배나 팔렸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 땅의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정의가 죽었기 때문인지 해석이 엇갈린다.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정의’와 대학시절 하숙집 광경이 떠오른다. 중3 때 광주 사태를 겪은 주인 집 딸이 경상도 학생들을 매섭게 쏘아 보는 것이다. 죄인 느낌으로 그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시절이 있었다.

부디 ‘노무현 2.0 정권 586’들이 과거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