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수 편집부국장

최근 한국 배구계가 국가대표팀 주장 김연경(29·중국 상하이)의 작심 발언으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끌벅적하다.

김연경은 지난 7일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필리핀·9~17일)에 참가하기 위해 출국하는 자리에서 “이번에도 엔트리를 못 채워서 간다는 것이 정말 답답하다. 그랑프리와 아시아선수권까지 20경기가 넘는데, 6~7명의 주축 선수만 계속 경기를 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김연경은 “이렇게 되면 선수들에게 무리가 되고, 부상이 올 수 있다. 이번 그랑프리 때도 중요한 결승에서 힘도 못 써보지 않았느냐”고 항변했다.

한국은 지난달 국제배구연맹(FIVB) 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2그룹 결승전에서 폴란드에 0-3으로 완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폴란드에게 2전승(3-1, 3-0)을 거뒀지만 중요한 결승전에서는 체력의 한계에 부딪친 데다 상대의 높이를 극복치 못하고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한국은 그랑프리 대회에 14명의 엔트리를 채우지 못하고 12명으로 선수단을 꾸렸다. 프로팀들은 고액 연봉을 받는 소속선수들이 다치면 큰 손해이므로 비중이 낮은 대회엔 가급적 보내지 않으려 한다. 때문에 이번처럼 엔트리를 못 채우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김연경을 비롯한 대표팀 선수들은 귀국 후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필리핀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엔트리에 1명이 적은 13명만 뽑았다. 김연경이 이런 상황을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그는 특정선수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김연경은 “이번 대회에는 이재영(21·흥국생명)이 들어왔어야 했다. 팀에서도 경기를 다 뛰고 훈련까지 소화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 빠졌다. 중요한 대회만 뛰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렇게 하면 고생하는 선수만 고생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우리도 돈을 많이 받아서 대표팀에 뛰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고 있는데, 엔트리와 같은 기본적인 지원조차 이뤄지지 않으면 솔직히 말해서 고생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김인경이 후배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목소리를 높인 것은 배구협회의 무책임한 행정을 질타하기 위해서다. 김인경은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대표선수의 관리뿐만이 아닌 인재 발굴 및 육성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라며 “실명이 거론돼 상처 받았을 이재영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김연경의 이번 작심 발언은 국가대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국가대표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명예로운 자리다. 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어릴 때부터 피땀을 흘린다. 인기 종목의 경우 국가대표 타이틀은 두둑한 연봉과 앞날을 보장한다. 일부러 대표팀에 빠지려는 선수가 있을까 싶다.

결국은 배구협회의 무능력한 행정으로 귀결된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3-0으로 꺾고 금메달을 딴 대표팀 선수들이 김치찌개 회식을 한 일이 있다. 오죽했으면 김연경이 사비를 털어 레스토랑에서 뒤풀이를 따로 했을까. 동호인들도 대회에서 우승하면 김치찌개 회식을 하지 않는다.

더 가관인 것은 지난해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선 선수단을 지원할 인력이 부족해 해외무대 경험이 있는 김연경이 통역까지 도맡아야 했다. 대한배구협회 직원은 AD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단 한 명도 리우에 가지 않았다. 이 지경이니 최상의 경기력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대표팀은 8강에서 네덜란드에 패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사실 선수들이 협회의 잘못을 지적하기란 쉽지 않다. 김연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론은 “김연경이 할 말을 했다”는 쪽이다. 코트 안팎에서 당찬 모습을 보여 온 김연경의 직격 발언이 배구협회의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죽비’가 됐으면 한다. 올림픽 등 ‘영양가 있는’ 대회만 가려서 소속선수들을 내보려는 프로팀들의 이기적 행태도 지양돼야 한다.

배구선수들은 손가락이나 무릎 등 잔부상을 달고 산다. 김연경, 김희진, 양효진 등 주축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부르면 몸이 좀 아프더라도 기어이 달려가는 선수들의 사명감이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스포츠 강국 코리아’가 있는 것이다. 국가대표가 상처뿐인 영광의 아이콘이 돼선 곤란하다.

문득 축구선수 이동국(38·전북현대)이 떠오른다. 마흔을 바라보는, 어느덧 K리그 최고참이 된 이동국은 평소 “국가가 부르는데 안 갈 도리가 없다. 국가대표는 신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동국은 18세부터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오가며 20년 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렀다. 몸 상태와 상관없이 부르면 다 갔다. 피로가 누적돼 큰 수술을 받았고, 2006년 독일월드컵 땐 재활에 매달렸다.

이동국은 2007년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미들즈브러에 진출한 첫해, 당시 핌 베어벡 대표팀 감독의 요청을 받고 비중이 낮은 아시안컵에 참가했다. 약삭빠른 몇몇은 아시안컵에 빠졌다. 입단 첫해인 만큼 EPL 적응을 위해 팀 훈련이 더 필요했지만 국가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동국은 정작 아시안컵에선 조재진에 밀려 교체투입되는 수모도 감수했다. 국가대표는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그런 시답잖은 자리가 아니다. 이동국이나 김연경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출중한 실력은 물론이고 국가대표가 갖는 의미를 잘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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