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여름이 농익었다. 눈이 부신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물은 쪽빛이고 산은 진녹색이다. 짙푸른 잎사귀마다 청량한 광택을 뿜어낸다. 마치 끓어오르는 적의를 드러내듯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태양은 이글거리고 더위는 절정이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안도현 시 '사랑' 전문)

매미의 시절이다. 그런데 여름 사랑꾼 매미가 이상하다. 고장 난 알람시계처럼 밤낮 구분을 못하고 발악하듯 울어댄다. 아침부터 참매미가 맴 맴 맴 노래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진종일 리듬감 없이 치이이- 치이이- 하고 말매미가 기다렸다는 듯 떼거리로 합창 한다. 쉴 만도 하련만 해질녘이면 참매미가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재등장한다. 반가운 시끄러움을 넘어선 소음 수준이다. 왜 아니겠는가! 땅속에서 긴 시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린 딱 한 번의 짝짓기가 아니던가. 그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웃의 경쟁자보다 더 크게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수컷의 숙명적인 사랑이 짠한 것을. 더 큰 합창을 해야만 포식자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들만의 생존방식이 딱한 것을. 그래서 그들이 맞이한 기회와 삶을 인정해 주며 공정하게 사는 것만이 인간과 매미가 공존할 수 있음을. 누가 뭐래도 오래 기다린 사랑 앞에선 치열하게 경쟁하고 위험 앞에선 서로 협력하는 그들만의 생존방식에 생각이 미치면 숙연해진다. 마치 우리의 삶과 비슷해 보여 멋쩍기도 하다. 반성문을 쓰고 싶어진다.

장마전선이 아주 잠깐 소나기를 데리고 왔다. 후끈한 지열을 조금 식혀줄 비지만 반갑다. 여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커다란 감옥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마치 체에 걸려 나온 송사리 떼처럼 우리 모두는 자기의 육신을 파닥거리며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어지니 말이다. 그래야 살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까닭은 각자이고 싶은 본능의 시간 때문이리라. 그래서 여름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앞에서는 곧 에너지가 바닥나는 무기력의 계절이기도 하다. 더위에 심신이 지친다. 맥 빠지는 느낌이다. 몸에 과부하가 걸려 일상이 무기력해진다. 무기력은 지친 몸이 보내는 알람이다. 불편을 넘어 두렵다. 무 의욕, 무력감, 무감정 등이 모호하게 겹친다. 기력이 소진되어 의욕이 사라지고, 안 하다 보니 못하게 되고, 못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지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럴 땐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을 향한 다그침을 내려놓은 뒤 나그네의 모습으로 떠나보자. 지금의 지친 삶도 여름만큼의 시간만 지나면 몸도 마음도 행복해진다. 계절은 금세 바뀔 것이고 신선해지기 시작하면 멈춘 것 같은 심장도, 머리도 다시 가동할 것이고 두근거릴 것이다. 시간은 묘하다. 기다림은 곧 기대감이다. 입추도 지났다. 곧 여름은 먼지처럼 조용히 갈 것이고 가을은 설렘으로 올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시샘해서 뭘 하겠는가. 욕심내면서 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쉬어가자 곧 가을이다.

의욕도 식욕도 떨어질 무렵 무화과가 농익어 맛있다. 부드러움과 오독오독 씹히는 꽃 수술의 조화라니. 풋것으로는 아무 맛이 없는 무화과를 달고 향기로운 무화과로 기다린다는 것은 여름이 농익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이제는 사과나 복숭아 같은 씹히는 과일보다 무화과나 수박 같은 부드러운 식감의 과일을 더 찾게 된다. 부실해진 치아 탓이다. 노란 생명력으로 빛을 발산하는 듯 외떡잎식물의 단단한 열매인 옥수수도 여름의 맛이다. 탱글탱글한 알들이 짭짤한 맛, 고소한 맛을 내며 입속에서 톡톡 터지는 찐 옥수수 한 자루만 있어도 한 여름, 어느 오후는 충분히 행복하다. 얼마 전 달달한 생감자의 비린내를 풍기며 합천 사돈댁 밭에서 햇감자 한 상자도 도착했다. 감자밭을 장기 집권하던 미색 감자를 밀어내고 왕좌를 꿰찬 자주색 감자였다. 웰빙으로 인기 있는 여름의 맛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 여름. 그 옛날 고슬고슬 대소쿠리 속의 꽁당보리밥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말랑말랑 차지고 혀끝에 탱글탱글 걸리는 보리밥에 강된장 얹어 찐 호박잎에 싸 한입 밀어 넣어주던 어머니의 쌈밥이 그립다. 밥상 앞에서 바쁘게 제비새끼처럼 입 벌리고 기다리는 자식들 입으로 향하던 그 손길. 너도 나도 볼록해진 배에서 뿜어내던 방귀소리조차 아름다운 멜로디로 흐뭇하게 들으시던 어머니. 부모가 가진 사랑이란 자식이 쉽게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얼마나 오래, 많이, 항상 사랑하는지 자식들은 겨우겨우 짐작만 할 뿐이라는 것. 빡빡! 쓱쓱! 어머니가 이른 새벽 우물가 돌확에서 보리쌀 씻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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