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빛을 다시 본 지 72년이 흘렀다. 어둠은 길고도 깊었고 극악했다. 해는 떴으나 암울하였고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불리우고 싶은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고 원하는 머리 모양도 할 수 없었다. 명분도 없는 전쟁에서 총칼로 타인의 목숨을 앗았으며 이윽고 우리들의 청춘과 순결과 생명까지도 먼지처럼 사라져 갔다. 말과 글과 자유를, 빛을 잃었다. 그리고 맞이한 해방이고 독립이다. 우리는 이를 ‘광복’이라 불렀다. 폐허 위에서 환희의 눈물과 함께.

35년만의 광복이라고 하나 백성들은 그 오래 전부터 이미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그림자가 채 가시기 전에 왜적의 침입을 다시 허용하고 말았다.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가 ‘코리아’를 도토리처럼 가지고 놀았고, 영국과 미국은 이 ‘제국주의 놀음’을 게걸스레 관람하고 있었다.

친중 수구 세력은 거스를 수 없는 근대화의 흐름을 놓쳤고, 친러 집단은 러시아의 검은 남하 야욕을 눈치채지 못했고, 친일 개화 그룹은 민중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친미, 친영 그룹은 국운을 짊어질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빛을 잃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이긴 일본은 늙고 병든 호랑이를 잡아먹은 변종 하이에나처럼 대륙 진출의 포식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열강들의 싸움에 끼어서 코리아는 아예 일본과 싸워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일본에 패배한 중국과 러시아는 왕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허울뿐인 대한제국 황제는 1910년 마침내 일본 천황에게 복속되고 말았다.

곧고 강한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빛이 사라진 세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노인들은 처참한 꼴을 더 보기 전에 속히 눈을 감기를 원하였고, 장정들은 힘을 올바로 쓸 곳이 없어 서로 물고 뜯고 할퀴었다. 청년들은 서구화를 가장한 왜색 문화에 자신들을 내맡길 지, 우리 것을 지켜 나갈 지 방황하였다. 아이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차라리 성장을 거부하는 편이 나았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주인공처럼.

여인들은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을 잃고 사랑을 빼앗기고 육체와 정신이 짓이겨진 채 폭풍우 속 풀잎처럼 짓밟혀 죽어 나갔다. 패배자의 아녀자들보다 불쌍한 존재는 세상에 없다. 사위가 암흑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오로지 빛나는 것은 희망을 잃지 말자는 서로의 눈빛이었다.

일본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가 동포의 대량 학살과 무자비한 수탈의 다른 이름인 줄 몰랐다. 죽더라도 대한제국 황제의 칙령에 의한 것과 쇼와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도와 죽창과 조총에 의한 개죽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최근에 일본 아베 수상이 인기가 떨어져 물러난다는 소식이 있었다. 내각 개조로 상황을 돌파하고 있는 듯 하나 일본 수상 평균 임기를 볼 때 얼마 남지 않은 듯 하다. 한일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을 때 막후 해결사들이 있었다. 세지마 류조, 박태준 등 이름하여 ‘현해탄의 밀사’들이다. 지금은 그 막중한 일을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전에 일본 아사히신문을 통해 아베 수상에게 몇 가지 당부한 바 있다. 다시 어려움에 빠진 한일 외교 돌파구 마련을 위해 포항을 한 번 다녀갈 것을 제안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 최초 대일 민간 외교사절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일본 열도에 아직 문명이 열리지 않았을 때 ‘빛’을 전해 준 은인의 고장을 한번 찾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본을 강조하는 아베 수상의 정치철학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둘째, 고려시대 왜구 창궐로 양국 관계가 단절될 상황에서 ‘특명전권 대사’로 파견된 포은 정몽주 선생 탄생지가 바로 포항이다. 당시 영남지역에서 압송된 5백여 우리 국민들이 일본 큐슈 일대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를 정몽주 선생이 높은 학덕과 명쾌한 논리로 해결하고 귀환시킨 일은 유명한 역사다. 이 사실은 아베 수상 지역구인 야마구치 지역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POSCO)가 이곳에 있다. 특히 아베 수상은 고베제강에서 3년간이나 근무한 적이 있는 철강맨이 아니던가. 정치가 막혔을 때 경제나 산업 분야에서 실마리를 찾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양국 화합의 상징인 포항제철소를 돌아보면 위안부 문제 등 전후 보상에 대한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난 김에 한가지 더. 당신들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 영토 ‘독도’ 또한 이곳 포항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일본이 우리한테서 뺏어간 ‘빛의 빚’을 제대로 갚겠다는 각오를 밝히기에 최적지가 포항이다. 공직에 있을 때 남의 이목이 신경 쓰인다면 자연인 아베 신조씨로 포항을 꼭 한 번 다녀가는 일은 의미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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