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형 부사장

한국사회의 경제시스템도 ‘생산의 우상’에서 ‘소비의 우상’으로 급변한 지 오래다.
최근 ‘살충제 계란’ 파동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먹거리 파동은 소비자 중심의 경제학에서 그 충격이 큰 것이다.

1929년 대공황은 사회적 우상이 ‘생산의 우상’에서 ‘소비의 우상’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자본주의 유지에 유리한 소비 이데올로기 효과를 얻게 된 것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비’는 낭비, 약탈, 고갈과 같은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광고와 마케팅에 힘입어 소비는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대공황을 기점으로 이른바 ‘소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실제로 대공황은 인류 문명사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바로 ‘소비(consumption)’라는 개념의 재탄생이었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단어는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심지어 폐병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공황 이후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선택’과 동일시되면서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 땅으로 몰려든 이민자들이 못내 부러워한 것은 교실과 공식 석상에서 찬양하던 시민적 참여의 이상이 아니라, 탐나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가서 원하는 물건을 마음껏 사는 것이었다. ‘참여’는 정치적 영역의 고매한 횃대에서 굴러떨어져 상업적 영역에서 소비자로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 격하되었다.”라고.

한국사회 또한 근·현대화를 거치면서 사회경제 시스템의 중심에는 항상 ‘생산의 우상’이 먼저였다.
어떻게 많은 상품을 생산할 것인가가 국가의 최대 화두였다.
특히 농경사회 중심의 좁은 국토에서 먹을 거리는 질보다 양이 우선이었다.
철강과 석유화학, 반도체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는 쌀이 곧 목숨이었다.
절대생산량이 부족함으로써 굶주림을 벗어나는 것이 통치의 최고 선이었다. 수도작 중심의 농경사회에서 품종개량을 통한 대량생산은 그야말로 곤궁한 국민의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경제트랜드는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의 문제다.
가격 파괴를 앞세운 무한경쟁이 아니라 ‘질’의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최대 화두가 됐다.
음식물을 찾아서 확보하기, 그리고 무엇을 먹을지 가려내기라는 두 문제는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생과 사를 좌우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국민들의 책임인가?
정부는 국민 영양소 격인 계란의 양산, 그리고 양질의 계란을 생산한다는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었다. 무항생제, 친환경 인증을 남발하면서도 사전·사후 관리에 손을 놓았다.
사전조치인 검사만 제대로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고된 인재(人災)다.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도 건강과 안전을 위해 무항생제 계란을 구입했다.
국가의 건강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앞서 조류인플루엔자(AI)와 구제역이 확산됐을 때도 정부 당국과 농가가 초동방역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진 바 있다. 최소한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는 방역부실이 한국사회 ‘소비의 우상’을 철저하게 기만하고 우롱한 것이다.

식품안전은 국민 안전과 안심 사회로 가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국가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이상, 국민 개개인이 모든 먹거리를 자가생산·소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말로만 먹거리 국가책임제를 논할 것이 아니다. 생산·수입·제조·유통·소비 등 전 과정에 걸쳐 안전 시스템을 전면 재구축해야 한다.

생산우상이 지배했던 시절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이란 구호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국민건강권을 시험하는 생산우상 정책은 소비우상을 파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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