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쑥부쟁이 지천으로 깔린 고택의 돌담 밑, 석등화창의 불빛이 바람에 일렁인다. 소슬바람 한 줄기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을 쓸고 간다. 승용차로 반나절 걸려 도착한 고택은 친정엄마처럼 와락! 우리를 반겼다. 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손에 쥔 식은 바닐라라테의 남은 향을 쫓는다. 몇 남은 담쟁이 이파리가 이끼 낀 돌담을 붙잡고 있다. 일행은 털썩 마루에 걸터앉는다.
제대로 된 개보수 없이 시간만 흐른 골동품 같은 고택에 이순의 여인네들이 모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따로 구분이 되어 있었고 마당에 우물이 있는 ‘ㅁ’자형 한옥이었다. 어딘가 남아있을지도 모를 유년의 추억 한 조각 찾고 싶었을까. 한 달 전, 아등바등 앞만 보고 살다보니 웃고 있어도 살짝 눈물이 난다는 친구가 제안해 나선 걸음이다. 남편 밥 짓기며 집안청소며 손자돌보기까지. 오늘 하루쯤은 잊자고 네 명의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나선 여행길이었다.
짐을 방안으로 들이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산나물이며 푸성귀 청국장이 함께 차려진 단출한 식단이었다. 갑자기 깊은 산속 수도승처럼 엄숙해졌다. 소박한 밥상을 앞에 놓고 보니 화려한 식단만을 지향했던 삶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맛으로 느끼는 고택체험이었다.
그새 젊은 관리인은 연신 아궁이에 장작을 디밀었다. 쩔쩔 끓는 온돌방에 참나무향이 스며드니 온 몸이 나른해졌다. 상을 물리고 굽은 등뼈를 천천히 방바닥에 누인다. 그러면 방바닥은 지그시 세파에 찌든 몸을 받아준다. 피곤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고택체험의 백미다.
힐링이 대세가 된 요즘엔 여러 가지 체험활동이 유행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즐기는 층이 다양하다. 숲 힐링, 강 힐링, 음식 힐링 등 종류도 갖가지다. 그 중에서도 한옥체험을 선택한 것은 잊어버린 옛날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 도회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지친 심신을 치유하려는 소망이 늘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루소만의 주장만은 아닐 것이다. 겨우 서로의 일정을 맞추어 이렇게 이틀간이라도 일상을 떠나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의 일인지 모른다.
싸와! 싸와! 뒷 숲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쌀 씻는 소리를 낸다. 문을 여니 먼 산봉우리 위로 달이 떠 있다. 고무신 코 같은 그믐달이 구름을 비켜가고 솔 향이 코끝을 스친다. 밤 부엉이가 울고 어디선가 계곡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청풍명월이 따로 없다.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방 안엔 저무는 달 같은 여인네들이 뭐가 우스운지 연신 깔깔거리고 있다. 일찍 남편을 잃은 친구, 대도시에서 자수성가한 친구, 서른 중반이 넘도록 장가 못간 아들을 둔 친구들. 한숨 섞인 푸념과 가슴에만 쟁여놓은 남편 흉과 가끔은 진한 농담들이 이어진다. 주부로서, 엄마로서 자신을 드러내놓고 내색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진다. 가슴이 멍해져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마루 밑의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추임새를 넣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여자들의 수다도 깊어간다. 한 겹 씩 옷을 벗어던지며 무장해제 할 때 마다 물큰 알싸한 들깻잎 냄새가 난다. 성글어진 머리카락위에 뒤집어쓰고 온 가발(헤어보톡스)를 내려놓는가 하면 부실해진 치아에 갈아 끼운 틀니도 서슴없이 빼놓는다. 그 모습들이 하현 같기도 하고 조금씩 스러져가는 고택 같기도 하다. 자지러지는 웃음 뒤에 쓸쓸한 쇠락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정도 한참 지난 시각. 구름 한 뭉치 동반한 하현이 대청마루에 석등처럼 걸려있다. 저무는 달 때문이었을까. 반질하게 기름 먹인 대청마루에 여인네들이 하나 둘 모여 앉았다. 정갈하게 쓸어놓은 마당에 희미한 달빛이 뒹군다. 대들보 옆에 기대어 바라보는 하늘에 별들이 쑥부쟁이처럼 피어있다. 이끼 낀 돌담과 낡은 마루며 장지문이며. 도회생활에선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누군가 판 피워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니 봇물 터지듯 하다. ‘‘살다보니 그냥 살아지더라”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이젠 다 잊어버렸다” 인생의 저물녘에 도착한 그녀들의 삶은 어떤 가을풍경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토닥토닥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가을밤 함께 저물어 갔다.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사랑의 시를 낭송했다. 가슴에 물큰하고 알싸한 것들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고택이 늙어가는 것처럼 누구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된다. 영원히 젊은 것은 없다. 고택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 시간의 더께가 있어 그렇겠지만 실제론 조금씩 제 자신을 덜어내는 무욕에 있는 것이 아닐까. 풍장처럼 저를 소멸시켜가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 거기에 진정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밤이 깊어가자 시끄럽던 여인네들도 잠자리에 들었다. 다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쉬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쯤 하현은 서산 쪽으로 지고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린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은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이 된다. 하룻밤의 고택체험을 하고 난 후에 우리는 올 때 보단 좀 더 가벼운 몸으로 귀가하리라. 저물어가는 고택처럼 욕심 몇 개를 버리고.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