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 신부( 실바노)

“김신부, 미국 좀 가야겠는데…”

주일, 입에서 단내나도록 미사드리고 강론하고 나면 초죽음이다. 그래서 월요일 휴식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그 월요일에 사무처장 신부님 -지금은 교구장 대주교님이 되셨다-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아무 생각없이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가 뒤통수를 때리면 이런 기분일까? 잠시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 하긴 한 것 같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면…”
“그래 생각 좀 해 봐라.”
“예, 한 달만 시간을 주시면…”
“아니다. 내일까지만 생각해라!”

나의 정하상바오로 한인성당 사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도착하니 웬 가정집이다. “사제관은요?” 하고 물었더니 여기가 사제관이라 한다. “성당은요?” 했더니 “없다.” “상가 빌려서 미사드린다.” 한다. 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자동차 뒤에 미사가방, 제의, 앰프까지 싣고 상가에 도착했다. “의자 펴라” 그렇게 취임미사를 드리고 나서 다시 한 소리 들었다. “의자 접어라” 우린 이렇게 사는 공동체구나, 하는 생각에 미국이라는 환상은 사라졌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도, 노력도, 돈도 투자를 한다. 그래서 그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정하상바오로성당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빨간 벽돌로 장식된 아름다운 성당을 지으면서 신이 나서 아침, 저녁으로 벽돌을 지고 나르던 일, 잘 가꾸어진 정원에 철따라 꽃이 피고, 매일 교우들과 미사 드리고, 세어보지 않아도 늘 성당의자를 꽉 채우는 신자들, 매일 이루어지는 신심단체들의 기도모임 등. 이런 것들이 내가 보고 살아온 본당(교회)의 모습이었다.

이·취임미사에 80여 명의 신자들이 오셨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없었다. 신자들을 만나고 싶어 구역미사도 다녔다. Valencia는 서너 가구에 네다섯 명이 전부였었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사제로서의 삶의 자세를 많이 바꾸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비록 변변한 건물도 없고, 내세울 만한 신자들 숫자도 없지만, 심지어 같은 지역의 한인개신교회의 한 주일 헌금 만큼도 안 되는 수입으로 일 년을 살아야할 만큼 경제적인 여건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성정하상바오로 한인성당에서 사목을 하면서 만나게 된 사제로서의 전환점이 된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주일미사 참례자가 늘어나면서 새벽미사를 한 대 늘렸다. 미사 후에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커피로 아침을 대신했지만 같이 아침을 먹어주던 신자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이후 정하상바오로성당이 Alemany High School 안에 있는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는 장소를 옮겼다. 교실도 주일학교, 예비신자교리, 단체모임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Wilkerson 주교님께 감사드린다.

너무 아름다운 성당이다. 의자를 접었다 폈다 하는 수고도, 미사가방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수고도 없게 되었다. 우리 건물이 아니라서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가에 비하면 궁궐이고 천국이다. 미사참례자가 300명을 넘어섰다. 상가에서보다 몇 배 늘어난 숫자다. Valencia는 반만 해도 네 개 반으로 불어났다. 아이들도 많이 늘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던 미사 시간에 떠들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아이들이 생겼다. 누군가는 성가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은 교회의 미래이고 하느님 사랑의 결실이다.

난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말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위해 영어미사를 시작했다. 고맙게도 아주 먼 거리에서 분도회 신부님들이 미사를 와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정하상바오로는 여전히 작은 공동체로 남아 있다. LA지역의 많은 본당들, 많은 신자들에게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아서 속상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공동체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참 행복했다.

지금은 여전히 큰 성당에서 많은 신자들과 매일 부대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매일매일 미국에서의 생활들을 되돌아보면서 매사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주교님, 하루만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혼자말로 앞으로의 삶에도 성정하상바오로 성당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기도하며 살아갈 것이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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