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높은 절벽에 외로이 피어있는 한 송이 꽃은 고결해 보인다. 슬퍼 보이기도 하나 우아하고 의연하고 당당하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유채꽃 군락은 자애롭고 편안해 보이지만 측은한 동정심을 일으킨다. 얼마나 모자라고 약하면 저리 무리지어 피어 살아 갈까.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혼자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가다 아무 곳에나 내려 길가 코스모스를 즐기던 젊은 날 손에는 황동규의 ‘풍장’이란 시가 들려 있었다. 매사를 혼자 결정해 버릇한 탓인가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지가 않다. 그렇다고 여럿이 있는 시간을 혐오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혼자 있게 되면 그냥 그대로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혼자일 때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아니면 지난 시절 회상을 하거나 살아갈 바를 구상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지 않는다. 호아킨 로드리고의 협주곡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혼자는 더 없이 풍성해진다. 잊혀진 친구, 아니 나를 잊었을 친구에게 쓰는 편지도 고독을 우아하게 꾸며준다. 사각거리는 필기도구 소리만큼 홀로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친구가 있을까.

외로움을 노래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불후의 명곡이다.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면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몰려다니며 썩은 고기나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기를 노래한 조용필은 위대한 가수임에 틀림없다.

‘정정한 거송이어도 좋다. 그 위의 한 마리 맹금이어도 좋다. 굽어 보고 고만하라’는 정지용의 시론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초기 인터넷 시대 아이디를 ‘맹금과 거송’으로 사용할 정도로 정정하고 고만하고 싶었다. 그 시기의 글들을 보면 채독을 잔뜩 머금은 푸성귀 같다. 온기를 구걸하거나 기댈 등짝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었으므로 페이스북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덕분에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고독을 찬양하려는 글이 되어 버렸는데 SNS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 살아가는 세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움이나 설레임, 두근거림 같은 감정은 이제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삶이 가벼워지고 앏아지고 그만큼 운치도 재미도 없다. 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놈의 손바닥을 장악한 작은 기계 때문에. 소파에서 거실에서 안방에서 엄마 아빠 자녀가 문자로 뭘 먹을지 정하는 세상을 어느 누가 살만한 세상이라 하겠는가.

곱슬머리 미국 청년이 개발한 페이스북에 하루 8억 명이, 한 달에 15억 명 가까이 접속하고 있다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하루 8억 명이 30분을 페이스북에 매달린다고 볼 때 엄청난 인류의 시간이 소모된다. 무려 4만 5,662년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 지구상에 등장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시간이다. 단 하루에 사라지는 시간이.

사회 공동망 서비스(SNS) 산업 관련 종사자들 입장에서야 고무적일 지는 몰라도 이 천문학적인 시간이 반드시 집단지성이나 덕담을 주고 받는 데 활용되지는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우울증으로 고독사를 선택할 사람을 사이버 세상으로 ‘연결’하여 살려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무분별한 댓글, 답글로 선의의 희생자를 만드는 일 또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자신이 공감할 이야기를 누군가 게시하면 나도 모르게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 달기에 열을 올리게 된다. 순식간에 괴담으로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낮의 새와 밤의 쥐’들이 퍼 나르기 시작하면 멀쩡한 사람 죽일 놈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다. 진짜로 나쁜 놈들은 이런 정도의 댓글에 꿈쩍도 안 한다. 욕이 배 따고 들어오나 천연덕스럽게 무시하고 즐길 것이다. 선량한 소시민들만 애먼 가슴을 태우며 심한 경우엔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마녀사냥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집단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인 보조 수단이다. 권력은 구성원들의 불안과 공포심, 적개심을 적절히 통제, 조작, 관리하는 힘에서 나온다. 강력한 힘의 구심점이 없는 집단이나 사회에서는 지진이나 산사태처럼 유언비어가 횡행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관심사란 대개 관습이나 미신 따위에 의해 형성되고 사라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 학교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하는 수업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초의 생명 박탈에 대한 교육이 아니었을까. 개구리 몸통을 손으로 비틀어 뜯어내고 다리만으로 실험을 한 기억도 있다. 언제 개구리가 죽는지 재미있게(?) 관찰했던 거 같다. 의사가 되지 않을 아이들에겐 잔혹한 고문이었다.

SNS 세상을 보면 개구리 실험이 생각난다. 어느 정도 표현으로 악플을 달면 누가 동조하고 덧붙이는 지를 즐기면서 그 당사자들이야 죽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고. 얼만큼의 힘으로 패대기를 치면 개구리가 죽을 지를 알아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엉뚱한 사람을 가해자로 몰아간 미나토 가나에의 ‘백설공주 살인사건’ 이야기, 우리나라 채선당 사건, ‘240번 버스’ 사건에서 나타난 ‘아니면 말고식 글 달기’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