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형 재울포항향우회 회장·전 울산대 교수

전깃불이 없었던 1960년대만 하더라도 시골은 추석이 되면 달맞이가 큰 행사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동네 앞산이나 뒷산에 올라가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풍년을 기원하고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 그 때는 보름달이 왜 그렇게 밝고 환했을까? 평소에는 어두워서 야간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밝은 달빛 아래 밤이 깊도록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놀았다. 동네 여인들은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강강수월래 놀이도 하고 당수나무 아래에서 그네도 탔다. 그러던 것이 전깃불이 일반 가정에 보급이 되고나서부터는 달맞이도 서서히 사라지고, 강강수월래 놀이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나라에 전깃불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1887년(고종 27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의 일이다. 그 해 3월 6일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 앞뜰에서 전깃불이 커졌다. 당시 향원정 연못가에 세운 전등소에서 7kw 에디슨 다이나모발전기 3대를 가동하였는데, 16촉광(觸光) 전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였다. 1879년에 에디슨이 탄소선 전구를 발명한지 8년만의 일이었다. 1898년(고종 34년)에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민간에도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나, 우리나라 일반 가정에서 본격적으로 전깃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1961년 7월 1일자로 한국전력이 발족한데 이어 1964년 4월 1일을 기해 '무제한 송전'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전기통신의 역사도 전기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1885년(고종 25년)에 한성전보총국이 개설되면서 한성과 제물포 사이에 최초의 전신이 개통되었고 그 후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서로전신(西路電信)이 건설되었다. 이어 1887년에는 서울-부산의 남로전신이, 1891년에는 서울-원산 사이에 북로전신이 개통되어 전신시스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전기통신과 전화가 민간에 보급된 것은 1982년으로, 이때부터 1가구 1전화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1997년에 PCS 휴대전화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동통신시대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필자의 고향인 기계면(杞溪面)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기 때문에 전기와 전화기 보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다. 집집마다 전깃불이 켜진 것은 기계면 문성리(文星里)에서 전국 최초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던 1971년 그 이듬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농촌지역에 전기와 전화가 보급되면서 우리의 생활여건도 크게 달라졌다. 돈만 있으면 편리한 문화생활이 가능해짐에 따라 돈을 벌기 위해 산업화된 도시를 찾아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이 점차 도시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예전의 대가족제도에서 탈피하여 이른바 핵가족을 선호하게 되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이 현실화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집성촌(集姓村)에서는 8촌(寸) 이내의 친족들이 함께 모여 고조할아버지 차례를 함께 지낼 정도로 촌수(寸數)를 중하게 여기고 서로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떠한가? 4촌간에도 왕래가 뜸할 정도로 친족의 개념이 희박해졌다. 심지어는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시장조사전문기업인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수도권 거주자 만 19~59세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답한 가정이 38.3%로 지난 2011년(22.6%)에 비해 15.7% 포인트 증가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우리 고유의 풍습인 명절의 의미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명절이 조상을 추모하고 친족끼리 정(情)을 나누는 기회로 여겼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가족 단위의 휴식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3~5년 후에는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를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명절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고, 명절 휴일의 존치 여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정부는 이와 관련하여 국민들의 중지를 모으고, 관련 법률과 제도를 정비해 나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미리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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