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홍 시인·자유여행가

세월은 잘도 갑니다. 새해 일출을 보러 가겠다고 나선지 그리고 모내기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벼들이 허리 넘게 자라 수줍은 듯 노랗게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볏잎에 손을 대면 손이 베일 것처럼 성이 나 있던 시절도 지나고 온갖 시련을 이겨낸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노랗게 익은 들판에 이렇게 날이 저물어 산그늘이 곱게 내리는 날, 하얀 옷을 입고 머리가 허연 농부가 뒷짐지고 논두렁을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나 아니면 벼이삭 끝에 맺혀있는 이슬들을 손으로 툭툭치며 늦게 돌아가는 아이들이라도 서너 명 들길에 있다면, 그 들길은 더없이 평화롭게 느껴질 겁니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그 옛날 보리가 익으면 ‘보리를 꼬실라’ 먹고, 모내기 하면 못밥을 먹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논두렁을 건너 뛰며 신났으며, 가을이면 벼 베는 논에 가서 메뚜기를 병에 가득 잡아와서 볶아 먹기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얗게 눈이 오는 들판 길을 내달리고, 무논에 얼음이 얼면 해 지는 줄 모르고 얼음 지치기를 하다가 마침내 양말이 다 젖고 옷이 젖어 추위에 벌벌 떨며 땅거미가 지는 어둑어둑 무렵 집으로 돌아갔던 아련한 기억이 생각납니다.

늦가을이면 동네 어른들은 물이 빠진 봇도랑에서 바닥을 파뒤집어 미꾸라지를 잡거나 둠벙의 물을 퍼내 고기를 잡았습니다. 봇도랑에 쌓인 흙을 파 뒤집을 때마다 흙과 함께 누렇게 뒤집히는 미꾸라지를 보며 우리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미꾸라지를 잡았습니다. 여름이면 마당가에 모기불을 피워주시고 밀가루 팥빵을 만들어 주시던 외할머니, 가을이면 뒷 뜰에 노랗게 익어가는 감 홍시를 따 주시던 외할아버지의 조그만 사랑은 아마 내가 그럴 나이가 되어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못자리에서 울려주던 주둥이가 노란개구리, 모 낸 논에 물을 가르지르며 가는 꽃뱀,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다 모내기 하면 가방을 내 던지고 무논에 들어가 모춤을 나르고, 못줄을 잡다가 먹던 보리가 드믄드믄 하던 흰 쌀밥, 못밥을 먹고 옷과 살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논두렁에 누워 늘어지게 자던 사람들, 모를 찔때 한 쪽으로 몰리는 파란 개구리밥풀과 벼를 벨때 한 쪽으로 후두둑 뛰는 메뚜기들. 벼를 다 베어내고 떠난 빈 들 끝에 자라던 파란 배춧잎과 논두렁의 하얀 억새들, 이 길을 나는 내 길로 알고 살았던 어린 시절. 나에게 이 작은 들은 그냥 들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며 세상을 익히고 자연을 배우는 ‘자연학교’였고, ‘인간의 길을 가르쳐준 학교’였다는 뒤늦은 깨달음, 아직은 더 느끼고 깨달으며 내가 살아가야 할 그 먼 길. 이제 저 빈 들에는 볏잎 가까이 날던 제비 한 마리 없고, 해 저문 들길을 가는 아아들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세월은 참으로 빠릅니다. 빠르게 가버린 세월 뒤에 무엇이 남았는가. 남은 것들이 나에게 무엇이며, 나는 어디에서 지금 무엇을 하는가. 오랜만에 나는 적막한 들길에 서서 나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나는 지금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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