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불은 인류 문명의 근간이다. 불을 발견하여 인류는 위생과 안전, 관계에 획기적인 혁명을 이뤄냈다. 불은 가히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둠을 밝혀 주고 추위를 막아주고 날 것에 숨어 있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주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도 까마득한 옛날 불의 보호로 살아남은 어느 조상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불을 최초로 사용한 흔적은 지금으로부터 150만여 년 전 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다. 불이 가져다 준 최고의 선물은 바로 ‘철’이다.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지나 온 인류는 자연발화설, 운석설로 추정되는 불로 철광석을 녹여 철기시대를 열었다. 보습과 쟁기를 만들어 잉여 농산물을 축적하고 칼과 창을 만들어 적을 무찌르고 동류를 지켜 집단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따뜻함과 밝음이 없는 이 땅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추위와 흑암이 지배하는 이 별에 생명이 존재했을 리가 없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화식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낙원엔 배고픔과 거주 보조장치가 필요치 않았다. 실락원 이후에나 불이 필요했던 것이다.

포항에 불의 공원이 생겼다. 포항 도심에서 천연가스가 누출되면서 붙은 불이 6개월째 계속 타고 있다. 포항시 남구 폐철도 부지 공원화 사업장에서 지하수 확보를 위해 굴착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면서 불이 붙었다. 인근에 도시가스 배관이 없어 일찌감치 천연가스로 추정됐지만,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보통의 천연가스와 달리 깊이 200m 지점에서 나오는 점 때문에 경제성은 낮을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가스안전공사는 보름 동안 누출된 가스가 최대 800여 톤에 이르며, 이를 주택용 천연가스 요금으로 환산하면 6억 4천만 원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최초 발화부터 지금까지 대략 85억 원, 11,000톤에 달하는 양으로 계산된다.

굵은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은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좋은 일이 이제 포항에 일어날 것만 같다. 정치 마당에서는 화해와 일치가, 경제 현장에서 회복과 새로운 성장이, 문화ㆍ사회 분야에서는 품격 있는 삶의 질이 나타날 것을 기대해 본다.

기왕이면 정치적으로는 용광로와 같은 화합의 불이었으면 좋겠다. 불순물과 찌꺼기를 태워 없애고 오로지 포항의 미래를 생각하는 순도 높은 결정체만 남기는 불 말이다. 불순물이란 애국, 애향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리와 사욕을 채우는 것이다. 이 경우에 온갖 더러운 스캔들과 비리가 찌꺼기로 남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포항을 생각하는 정치란 어떤 것일까. 소속한 무리 집단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53만 시민의 총체적 행복을 추구하는 열정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합리적인 기준과 정정당당한 검증 과정을 거쳐 지역 사회의 일꾼을 가려내야 한다. 앞서 나가고 있는 분들도 의연하게 후발 주자들과 기회를 공유하면서 기량을 맘껏 펼쳐서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다.

뒤에서 쫓아가는 후발 주자들도 선발주자 뒷다리 걸기 같은 구시대적인 방법 말고 상대방이 잘 하는 점은 잘 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이를 능가하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대안을 밝히는 게 낫다. 첨단 정보화 사회에서 유권자들은 어지간한 것은 다 알고 있다. 구시대 정치 꼼수가 적힌 꾀죄죄하고 너덜너덜한 공책은 불의 공원에다 확 다 태워 버리는 게 좋다.

경제적으로는 혁신과 창의의 불씨가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포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일단 포스코와 손을 잡아야 한다, 철강관련 분야여야 한다"는 등의 과거 공식은 이제 통하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무모한 첨단산업 분야 선발대 실험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 "일단 회사를 설립해 놓고 관계 요로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면 일단 몇 년은 버틴다, 나중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해 보자"는 식의 그야말로 무모한(벤처) 창업도 시대 착오적이다.

경제가 회생하기 위해서는 정부, 가계, 기업간에 원활한 협력이 있어야 하며 이를 지방 정부가 유효하게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공생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자영업도 잘 되고 일 자리가 창출되고 자금도 원활하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기업가 정신이 발휘될 토양을 조성해 놓고 훌륭한 기업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문화적으로도 포항의 품격이 한층 더 높아져야 한다. 현재 포항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국제 불꽃축제가 그야말로 글로벌 페스티벌로 승화될 때가 되었다. 일본, 중국, 대만 등으로부터 축하 사절이 참가하도록 교류를 확대하고 우리 중앙 정부에서도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협의해야 한다. 포항 불꽃축제의 배경으로 포스코 용광로, 연오랑 세오녀 불빛 설화, 그리고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제일교회 건물만 남은 이야기 등이 있었는데 이번 불의 공원으로 그 의미가 추가된 셈이다.

사회적으로 이웃을 배려하는 새로운 풍토가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친절과 서비스 마인드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 정연한 논리와 명확한 근거, 상대방을 배려하는 예의, 아무리 화가 나고 다급해도 금도를 넘지 않는 분별력 등 포항 고유의 토론 열기가 저 불꽃처럼 활활 타 오르면 좋겠다.

오백 년, 천 년이 지나 이 자리에 설 누군가를 상상하면서 제법 무게가 실린 굵은 가을 빗 속 불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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