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가을이 처처에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까마득한 계단을 층층 내려서듯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집안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하산하는 등산객처럼 곧 단풍도 울퉁불퉁한 산맥을 따라 가쁘게 남하할 것이고 시득시득 말라가는 가을꽃의 향연도 펼쳐지리라. 불꽃 터지듯 화려한 봄의 매화, 진흙탕에서 피어난 여름 연꽃이 지나간 자리에 국화를 필두로 맨드라미, 구절초, 산도라지, 코스모스…. 고개만 돌리면 지천이다. 어디 봄의 화려함에야 비하겠냐만 가을꽃의 농익은 완숙함도 여백으로 남을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다.
소리뿐인 단골손님도 왔다. 여기저기 폴딱폴딱 뛰어다니는 귀뚜라미다. 그 경망스럽기도 잔망스럽기도 한 작은 설침 또한 돌아온 각설이마냥 반갑다. 무슨 안테나 같은 모양으로 한 철 나타나 온 힘을 다해 이편의 자연을 저 세상으로 송신하는 의무를 다하려 애쓰는 모습 같기도 해 내심 짠하기도 하다. 우는 소리 또한 박자는 분명한데 딱히 선율이 고르지 않아서 일까 음악이라 하기에는 뭣하지만 정겨운 소리다. 가까운 듯 멀고, 시끄러운 듯 고요해 마치 사람이 혼자임을 일깨우는 듯하다. 소슬바람에 일렁이던 마음이 느긋하게 가라앉는다. 공허하게 뚫려 있던 마음 속 구멍에 산소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쌉쌀한 가을바람에 통통 튀는 듯한 저 소리를 듣지 않고 어찌 가을앓이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통금처럼 느껴졌던 지난여름의 찜통더위도 이제 꿈인양 아득하다. 더웠던 것만큼 몸은 늙었고, 여러 가지 일에 분노했던 것만큼 마음은 상했다. 그러나 앓지도 않고 멀쩡히 가을을 맞았다. 다행이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이 가을엔 그동안 쌓인 부질없는 것들을 버리고 비워 공간을 훔쳐내야 하는 시간이다. 마치 긴 겨울잠을 자기위해 누울 공간을 준비하는 곰처럼 긴 휴지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려는 정리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막히고, 겹치고, 헝클어진 집안 정리를 시작한다. 치워야지 하면서 눈총만 주고 말았던 것들이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쌓이고 쌓여 어느새 삶의 공간을 잠식해 버린지 오래다. 대가족이 희로애락을 느낌으로 공유하던 물건하나에도 이유와 명분을 지니지 않는 것들이 있었던가. 그러나 자꾸 쌓이다보니 어느 순간 그것들은 공존이 아니라 대치의 형국으로 신경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태산처럼 마음을 짓누르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때 쯤 더 이상 마음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질없는 것이 너무 많이 누적되어 허전함 조차 느끼지 못하고 타성과 관성에 젖어 살아온 자신의 처지를 조용히 주시한다. 이제는 삶의 흐름을 멈추고 모든걸 재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어떻게든 정면승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순간 변하고, 매순간 흘러 우주의 무한 변화에 상응하는게 인간이 아니던가. 이 모든 것이 당시엔 누군가를 사로잡아 빛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헛웃음 짓게 하는 것들이다. 대부분 성장한 아이들이 남기고 간 것들이 추억의 한끝을 잡고 있어 버리지 못한 것들이지만 켜켜이 쌓아놓은 자신의 것도 만만치 않다.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운 슬픔으로 남아있는 오래 된 물건도 있고, 메아리조차 없는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며 방황했을 아이들의 추억어린 것들도 있다. 보물찾기 하듯 구석구석 숨겨놓은 아이들의 것부터 찾아 꺼내놓는다. 떨어질까 두려운지 두 짝이 꼭 붙어있는 신발장의 주인없는 신발도 내놓는다. 좀 슬은 옷장속의 내 옷가지며 바스러질 듯 빛바랜 오래된 책도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교만한 마음에 잘난체하다 불행했던 기억도, 옹졸한 처신에 얼굴 뜨겁게 부끄러웠던 흔적도 같이 담는다. 분노가 있었고 사랑이 있었던 대가족의 좁았던 공간이 차츰 비어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별생각 없이 혹은 좋은 의도로 한 이야기가 상대방의 취약한 부분을 건드려 지뢰밭같이 아슬아슬하기만 했던 그 공간에도 어느 듯 가을여백이 들어와 앉는다.
묶어 내놓은 봉투가 수북하다. 봉투가 쌓이는 만큼 비워졌다. 마른 젖가슴 파고드는 새끼고양이에게 날카로운 이빨 드러내며 쫓아내는 어미고양이의 심정이랄까. 처음 자전거를 배울때 짐받이를 잡아주던 아버지가 슬그머니 손을 놓았을때의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짐짓 태연한척하면서도 차마 보내기 싫은 저릿한 아쉬움이다. 그러나 버리고 비워야 하리. 마음으로 벼르고 별러도 삶의 관성과 타성에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넉넉한 여백이 자리한다. 마침내 사로잡혔던 힘에서 풀려나 해방되는 느낌이다. 비우는 그 과정에서 내 부질없는 집착과 망상도 돌아본다. 온전히 드넓어진 여백의 공간에 앉아 서걱대는 갈대의 부대끼는 소리에 심신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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