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어떤 마을에서 살고 싶은가. 자연 환경이 아름다운 목가적인 마을? 의료와 첨단 기술이 어우러져 살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마을? 그보다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에 살고 싶다. 도시든 촌락이든 인간이 살아가는 현장은 마을 공동체다.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가치와 이익을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남에게 주고 베푸는 것보다 얻고 받는 게 많다는 의식, 즉 이웃에 신세를 지고 살아간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주는 것을 과대포장 하고 돌아오는 것이 미흡하다는 계산 착오는 더불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마을이 어떤 마을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늘어난다. 바쁘게 몰입하여 살아갈 때는 주변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한 숨 돌릴 때 문득 내가 어디에 있지 하는 물음이 다가온다. 이웃과의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으면 이 때 좌절과 우울감이 파고들게 된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행복의 기초요건이다. 우리 주변에 이야기는 많다. 전설과 설화, 민담이 널려 있고, 포항제철을 둘러싼 현대판 성공 신화도 적지 않다. 자장가로 들려 주신 할머니 이야기는 어른이 된 지금 문학의 근간으로 자리잡아 있다. 남들 가진 것 절반만 갖고도 사랑과 행복에 성공하는 대반전 헤피 엔딩 ‘반쪽이’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도 다음 대목이 궁금하고 긴장이 되는 이야기다. 스르르 잠이 들어 꿈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상상력을 무한대로 가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야기의 계절 가을이 깊어가는 게 아쉬워 땅거미가 질 즈음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지 않고 떠나는 것은 여행의 묘미다. 발 길 닿는 대로 떠난다기 보다는 손짓 하는 곳으로 이끌려 본다. 속리산 은행나무 황금빛 물감, 덕유대 단풍이 끝까지 경합했으나 결국 지리산 뱀사골 이야기가 이겼다. ‘달빛’ 보다는 ‘88’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한 고속도로를 2시간 남짓 달려 지리산IC에서 빠졌다. 숙소가 다섯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겁(?)을 먹고 계좌이체까지 하고 가는 길인데 차량이 드물다. 앞차 꽁무니를 따라 가면 좋으련만 하이빔을 비춰야 할 정도다. 음독사한 이무기가 배경인 뱀사골이란 이름이 으스스하다. 하필 이런 밤에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 가련한 여인이 본넷 위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다. 빨치산 게릴라들이 동면중인 뱀을 잡아 먹고 죽은 유령이라도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캄캄한 모퉁이를 돌 때 마다 이야기들이 툭툭 나타난다.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대규모 숙박시설은 아직 여유가 많다. 순진한 자신에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행락객이 들이닥치기 전 쌀싸름한 아침 산 정취는 늘 숙박비를 보상해 준다. 천년 묵은 소나무가 있고 구름이 쉬어간다는 마을까지 올라보기로 한다. 선명한 칼라와 함께 나뒹구는 낙엽은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절대로 죽지 않겠다는 결심, 결코 떨어지지 말라는 당부라도 나의 심장에 꽂아 주려는 듯. 대롱대롱 그대로 오그라든 잎들은 존엄사의 당위성을 떠올리게 한다. 중력과 바람을 이겨 내고, 수액 보존을 위해 불필요한 잎을 떨구려는 나무 의도를 묵살하고 꿋꿋이 매달려 있다. 약초 부침개를 권하는 할머니의 커피를 주문한다. 스물 다섯 종류 반찬 백반 소화가 진행 중이라 부침개는 하산 길에 맛보겠노라 했다. 일제와 6.25 전쟁을 겪었다는 팔순 노파의 삶과 한국 현대사 시놉시스가 전라도 사투리로 뱀사골에 울려 퍼졌다. 일본인 산적 이야기에 ‘일본을 쉽게 용서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다짐이 든다. “이렇게 돈을 많이 주면 어쩌누” 하는 인사를 들으며 오르던 길에 올랐다.

일천 살이 넘었다는 소나무는 과연 정정하고 의연했다. 이 나무 바람소리를 들으면 태아가 훌륭하게 탄생한다는 이야기가 솔잎에 매달려 있다. 코레일 철도 여행 인파의 시선을 적당히 응대하며 하산했다. 남원 추어탕과 광한루, 최명희 혼불문학관, 임실 치즈 테마파크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보름달이 유난히 크고 견고했다. 달나라 토끼와 이몽룡과 성춘향의 러브 스토리, ‘혼불’에 등장하는 거멍굴 사람들, 치즈 이야기를 되짚다 보니 어느새 포항 톨게이트다.

우리에게도 이야기가 있다. 다만 서쪽 지방과 비교하면 ‘이야기의 산업화’라는 관점에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선 이야기를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능가하는 세계적 로맨스 스토리에 일본을 끌어들여야 한다. 일본측이 자존심을 내세워 외면할 수도 있겠으나 스토리와 연계한 관광 수입을 제시하고 한일 공동 기획 축제로 승화시켜 나가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공사가 진행중인 연오랑 세오녀 테마파크 전시관은 정말 제대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보경사나 오어사의 아름다운 경관이 일천만 관객 영화 배경으로 나오도록 기획을 해야 한다. 학계, 산업계, 문화ㆍ예술계, 정치인 모두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이야기 산업화 아이디어’를 내놔야 한다. 부대 이전이 불가하다면 해병대와 해군이 앞장서고 해양과학고도 합세하여 ‘연오랑’ 루트 기념 국제 요트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교부와 주일ㆍ주한 양국 대사관, 문화체육부 공동으로 ‘정몽주 포로 송환 외교 항로 체험 이벤트’도 충분히 이야기가 된다.

마을에 ‘정’ 보다 ‘선의’가 필요하다는 현존 우리나라 대표 지성 김우창 선생 지적에 공감한다. 이에 더하여 이야기가 있는 마을의 ‘격’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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