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번 포항 지진 때 들었다. 사정이 있어서 마침 포항에 혼자 있는 상황이었다. 가족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일본에 있을 때 여러 종류의 지진을 자주 경험했다. 지난 해 경주 지진도 겪었던 터라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길 법도 하다. 그런데 어느 일본 지식인에게 들은 말이 되뇌어진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내성과 면역이란 게 있는데 지진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 체험에 비례하여 공포감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는 말이. 진도 5.4 지진이 있기 수 분 전 3층 건물에서 작은 흔들림을 느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지진동이 일어났다. 매뉴얼에 있는 대로 대응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지나고 보니 본능적으로 매뉴얼대로 움직인 게 되었다. 조심조심 머리를 감싼 채 출입구를 찾아 내려왔다.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도로 위에는 콘크리트 더미가 쌓여 있고 소방차나 구급차 경보음도 여기저기 들린다. 사람들 눈에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역력하다. 연이은 4.6 여진은 더 큰 불안감을 던져 준다. 3.6 ~ 3.7급 여진도 당혹감의 세기는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느낌이 계속 든다. 육중한 트럭이 지나가는 굉음과 진동에도 깜짝 깜짝 놀란다. 바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자주 든다. 배 멀미, 비행기 멀미 보다 땅 멀미가 가장 무섭다. 땅이란 우리가 의지할 마지막 피난처다. 두 발을 굳건히 딛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면 어지간한 시름도 잊혀진다. 일 자리를 찾는 젊은 고민도 어떻게 늙어가야 할 지를 모색하는 슬픔도 땅이 든든하게 받쳐줄 때 이야기다. 이 번에 그 땅이 흔들린 것이다. 비록 10여 초간의 짧은 시간이긴 하더라도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공포였다. 혼비백산이란 말은 이 때 사용하는 것이며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이 때 드는 것이다. 찰나이긴 하나 그간 살아온 삶이 순식간에 반추된다. 어떤 얼굴이 떠오르며, 어떤 일들이 잊혀지지 않으며, 무엇을 하지 못한 게, 혹은 무엇을 해 버린 게 아쉬운 지 명확하게 스쳐 지나간다. 살아남으면 당장 그 일부터 먼저 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되는데, 그 문제는 이리저리 해결하고 넘어가야 되는데, 그 녀석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해야지, 죽음을 느끼며 다짐한 것들은 그러나 안도감과 함께 또 쉬이 잊혀진다. 인간은 나약하고 초라하며 삶은 부질 없는 것일까 과연.

순식간에 집을 잃고 다치고 놀란 가슴들이 피난 장소로 모여들었다. 언제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막막하다. 수능이라는 인생 최대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모든 시계를 맞춰 두었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난데 없이 턱하고 앞에 펼쳐졌다. 예정된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덩그러니 앞에 서 있는 일주일이라는 불청객을 맞아야 되는 수험생 마음은 쉽사리 가늠이 안 된다. 마치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고래가 잡혀와서 ‘자 해체해 봐라’ 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경험해 보지 못한 재난이라는 점에서 포항의 모든 영역이 유사한 상황이다. 다른 지역에서 부족한 공부를 더 열심히 챙겨볼 시간을 얻은 학생들과 불안한 상황에서 불편하게 일주일을 보낸 학생들이 같은 시험을 치르고 같은 잣대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그래도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은 불평등과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낼 때가 아닐까. 노란 점퍼를 입은 공무원들과 연두색 조끼를 걸친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대처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일 만 명 가까운 인원이 자발적으로 구호와 복구에 참여하여 신속하게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다. 지금 포항에서는 위대한 인간 정신이 승리하고 있는 중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의 설명이다. “재난이나 위기 상황일 때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외부 자극에 대비하기 위해 교감신경계에서 호르몬을 배출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로 인해 대처반응이 늦어질 수 있다. 또한 인간에게는 위험을 인식하고 싶지 않은 속성이 있다. 바로 ‘정상화 편향’ 심리이다. 위험하고 위협적인 상황이건만 그다지 위험하지 않고 안전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싶어한다. 위급한 상황임에도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관찰하고, 더 확실한 정보가 생길 때까지 지체하는 경향성이다.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해왔던 행동을 그냥 하고 싶은 성향 때문이다.”

지진 있은 후 솔로몬의 이야기를 강조하는 주일 설교가 와 닿는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인간이 노심초사 마음을 쓰고 아등바등 해야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하루하루 즐거움을 나누며 소박한 기쁨을 누리는 일 말고 행복이 무엇인가.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어지는 몇 차례 여진은 앞으로의 삶을 더욱 단단하고 예리하게 살 것을 다그치는 듯하다. 불필요한 가재 도구들, 입지도 않고 아껴두는 옷들, 비 올 때 품 안에 모셔야 할 명품 가방들, 과잉 말과 행동들은 방지되거나 제거될 필요가 있겠다. 살아가는 데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다는 게 드러났다. 무엇을 위해, 얼마나 의미 있게 또 옳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짚어 보아야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깔찌 뜯기’(아귀 다툼의 포항 말) 하지 말고,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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