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허경태(편집국장)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착벽투광(鑿壁偸光)이라는 고사가 나온다.

중국 전한(前漢) 때, 재상을 지낸 유학자 광형(匡衡)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가난한 탓에 낮에 일해서 모은 한 푼, 두 푼의 돈으로 책을 사서는 밤늦게까지 읽었다. 그런데 등불을 켤 기름이 없었다. 생각 끝에 이웃집 벽에 몰래 작은 구멍을 뚫어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그 동네에는 글자를 하나도 모르면서 책만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가 있었다. 평형은 짐을 꾸려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한밤중까지 일했지만 전혀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인이 무얼 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당신 집안에 있는 책을 잃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주인은 매우 감탄하여 책을 빌려 주었다.

광형은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어 나중에 유명한 한나라 원제의 재상이 되었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착벽투광으로 가난하지만 학문에 힘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힘들게 공부함(苦學)을 비유하는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에 형설지공(螢雪之功)이 있다. 중국 진나라의 차윤(車胤)이 반딧불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雪) 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배움에 대한 욕구는 가난도 극복할 수 있으며, 힘들게 공부한 노력의 결실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家若貧이라도 집이 만약 가난하더라도

不可因貧而廢學이오. 그 가난으로 말미암아 배움을 그쳐서는 안 될 일이요.

家若富라도 집이 만약 부유하더라도

不可恃富而怠學이니라. 부유함을 믿고 배움에 게을러도 안 될 일이다.

貧若勤學이면 가난하여도 만약 배움을 부지런히 한다면

可以立身이요. 능히 입신할 수 있을 것이며,

富若勤學이면 부유한 이가 배움을 부지런히 한다면

名乃光榮하리니. 이름이 더욱 빛날 것이다.

위 구절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주문공(朱文公)의 권학문으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평생교육이 보편화되고 있고, 공부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급증하고 있지만,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되는 실용영어나 자격증 등의 스펙 늘리기에만 급급하고 있다. 인격을 수양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인문학의 가치는 땅바닥으로 추락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최근 하버드 박사의 한국표류기란 부제가 붙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의 저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글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한국 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미국, 유럽, 일본 등과 비교하면서 정확한 대안과 함께 한국인에 대한 진심어린 충고의 말에는 눈물이 났다.

특히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육보다 지식의 양을 주입하는 후진성 교육에서 빨리 벗어나야 함의 당위성과 일본인들의 독서에 비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실용적인 공부만 하고, 인문학에 대한 책을 읽지 않고, 자기 성찰을 위한 독서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한국인의 미래에 대한 우려는, 한국인에 대한 애정 그 이상의 한국 사랑이었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도록 한국에 살고 있으면서 저자보다도 더 한국을 모르고 살아온 내 자신에 대한 혹독한 반성을 하게 만든 외국인의 자전에세이를 읽으면서 한국인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의 냉정하고 깊은 통찰력에 공감이 갔다.

이런 학자가 한국에 진정 필요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를 만날 기회가 된다면 진심이 담긴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 몸은 늙어도 정신은 늙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통해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학력도, 기술도 아니다 넘어야할 건 현재의 자신이다.

착벽투광(鑿壁偸光)의 고사에서 보듯이 형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는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최근 들어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지났다는 말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감 없는 게으른 자의 변명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시대착오적인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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