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문석호의 심리칼럼] 연금술과 고통문석호 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많은 것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현대문명에서 융은 왜 과학 전단계로 여겨지는 연금술을 심리학에 끌어들였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진다. 연금술이라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 마음에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연금술이 다른 상징들이 제공할 수 없는 정도로 인간 무의식의 심층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할 수 있는가이다.

 꿈이 무의식을 드러내듯 연금술에서의 이미지가 집단의 꿈으로서 우리에게 공통된 무의식을 드러낼 수 있느냐이다. 현대정신이 시작되던 때 하지만 자연에 대한 탐구자들인 그들이 아직은 반은 잠들어 있어 자연에서의 물질들에 자신들의 환상을 투영하고 그래서 연금술(alchemy)은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집단적인 꿈이었던 셈이다.

 '무의식'이란 우리의 마음에 억압된 그리고 소홀히 한 부분들이 은폐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 은폐된 것에는 두려워하는 것 마주치기 고통스러운 내용이 많을 것이다. 자신에게서 용납되기 어려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을 융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림자도 그렇고 자신에게서의 단점도 대극의 한쪽으로 자신의 인격을 구성하는 것이고 우월, 열등처럼 서로 비교되는 부분으로서 사고가 우월한 사람이 감정에서는 절름거리지만 한 사람 안에서는 살아있는 전체로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부분이 개성이 되었을 때는 이 개성을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의 부분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개성적인 사람의 성격은 좋은 성격 나쁜 성격으로 분류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다 각자 매력 있는 자신의 성격인 것이다. 그래서 개성은 상대가 아니고 절대이다. 나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인격'이라고도 불리는데 아직 분화되지 않아서이지 나의 전체로 통합될 부분으로서 미래에는 우월한 것이고 전체의 부분으로 내 안에 있는 것이므로 나쁘고 좋고를 따지는 것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개성적인 인격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 장점이나 단점이 개성에서 어긋나고 전체적으로 통일되지 않을 때뿐일 것이다. 이런 통일을 연금술에서는 동양의 도(道)에서처럼 대극합일(coniunctio)라고 부른다. 융 심리학에서는 '콤플렉스와 원형적 이미지'인 정신 내용을 자아와 연결하는 것으로 즉 대극이 만나는 것인데 예컨대 무의식과 자아, 타자와 나, 그리고 객관과 주관이 만나는 것이고 이런 통합 과정을 개성화라고 부른다.

 개성화로서 우리의 발전은 결코 일방적인 발전이 없다. 항상 대극에서 그 둘을 같이 가져가는 것으로서 대극의 합일에서다. 그래서 승리만으로는 발전하지 못한다. 발전을 위하여 승리 말고 패배가 필요하다. 모두 승리를 추구 하고 패배를 피하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이지만 항상 승리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은 것이 아닌 것이며 그것은 대극경험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자아중심에서 상대적으로 비교만 하고 있으면 끝이 없다. 영원히 대극으로 나뉘어서 욕망하고 충족하고 욕망하고 비교하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간단하게 보이는 단점 장점 좋은 것 나쁜 것이 사실 엄청난 어려움을 가진 심리적 그리고 연금술의 문제라고 한다. 이 대극을 같이 끌고 가서 결국 통합에 이르는 것이 연금술의 목표인 대극합일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장애물이 있는데 시작에서 용(龍)을 만나는 어둠의 시기로 nigredo라고 부르는 고통의 시기가 있다. 어둠 패배 고문 절단 부패 등이 관련되는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활 재생 성장 같은 긍정적인 것으로 인도된다. 어둠은 그림자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면서 빛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그림자는 가까이 하기 힘들고 자아중심에서는 더욱 보기 어려운 것인데 새로운 중심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고통의 단계가 필요하다. 보통 우리가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방어적으로 하는 '무의식적 투사'를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작업을 할 때에는 자아 쪽에서는 '상처'가 생겨난다. 그래서 통합된 상태를 경험함은 좁은 자아에게는 패배감 같은 것이다. 패배는 무의식에 이르는 관문이 된다.

 그런데 연금술에서의 고통도 그렇고 심리학적인 고통이란 이런 통합된 전체 같은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만 작업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융은 그가 만난 한 노파를 예로 들면서 연금술의 의미를 말한다. 어느 날 아침 꼬깃거리는 종이에 써진 편지를 받는데 그녀의 생애에서 단지 한번 융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왠지 강한 인상을 받아서 허락하여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초등교육이라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녀의 동생과 같이 살았는데 신문좌판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고 곤궁한 삶이었을 것이다. 융은 그녀에게 자신이 쓴 그 연금술 책을 정말로 이해하는지를 공손하게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여보시오, 교수님 당신 책은 책이 아니에요 그것은 빵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생명은 지식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원형적 이미지'를 먹고 산다고 할까 그런 이미지들로 하여 필자도 고통스러운 삶일 때도 그 노파처럼 마음에서는 행복했었던 것 같다.

대경일보   webmaster@dkilbo.com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경일보 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