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이주민, 고향인 울진 방문58년 전 사라호 태풍 이재민 66세대 364명 이주
   
▲ 임광원 울진군수 환영사
無에서 有의 기적을 이룬 강원도 울진마을

58년 만에 첫 고향 방문해 꿈속에서도 그리던 내고향 울진!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이 될 고향땅 밟기에 나서 고향 친척 및 친구들과 회포를 풀며 행사를 주관한 고향 근남면발전협의회와 울진군, 한울원자력본부 등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잘 가거레이, 부디 잘 가거레이, 부디 부디 가서 부자 되거레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 우리가 또 만날거 아이겠나!" 꼬깃 꼬깃 꼬쟁이 안주머니에서 10환 자리 한 장씩을 그들에게 찔러 주면서 연신 저고리 소매로 눈물을 닦던 이웃들. "아~ 알았니더 고맙니더! 꼭 부자돼서 고향에 올게요. 전부 다~ 자알~ 계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목이 메여 하직의 말도 끝맺지 못한 채 그렇게 그들을 태운 낡은 화물트럭은 슬픔의 아리랑이 되어 7번국도 저 끝으로 점점 사라져 가버렸다.

울진군 근남면발전협의회(회장 김백일)는 지난 5일부터 6일까지(2일간)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이상경 마현1리 이장) 이주민 80여 명(최고령자 정호남(83세,여)이 고향인 근남면에서 고향집터 찾아보기, 울진군청 방문, 울진엑스포공원, 한울원자력 홍보관, 죽변항과 드라마세트장 등을 찾아 고향의 정을 나눴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의 울진마을의 역사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는 한마디로 無에서 有의 기적을 이룬 울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이 울진 근남면에서 머나먼 철원으로 떠난 사연은 1959년 9월17일 추석 날 새벽에 몰아친 제14호 태풍 ‘사라(Sarah)호' 가 울진을 휩쓸면서였다.

이재민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마현 1리는 벼 포기 하나 꽃을 땅도 없는 황무지였다. 하지만 피눈물과 피땀으로 그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어느세 세월은 한 갑자가 흘러가고 부둥켜 안고 살아온 울진사람들. 당시 태풍으로 날아간 집이야 없겠지만 그리던 고향땅, 그 땅이야 어디갈까? 땅이라도 실 컷 밟아 원 한번 풀어보세. 이 생에서 또 있을까? 절호의 기회로다...,

제14호 '사라호' 태풍에는 사망과 실종 849명, 이재민 373,459명, 선박파손 11,704척, 경작지 유실 216,325정보, 총피해액 1,678억원 등으로 피해가 엄청났다. 선박파손이란 용어가 유별난 동해안, 울진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큰물에. 거랑들이 천방’을 넘쳐 곳곳의 마을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해 겨울 혹독하게 보낸 이재민들에게 이듬해 초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홍창섭 도지사가 철원군에 이주하도록 권유했다. 땅을 개간해서 농토를 만들 동안 충분한 장비와 양식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 때문에 1960년 4월3일, 66세대 364명이 군용트럭 23대로 나눠 타고 트럭으로 3박4일 동안 덜컹거리며 5일만인 4월7일에 도착했다. 당시 임산부인 안정희 씨는 화천의 모 초등학교에서 딸을 순산하고 아이는 화천이란 별병을 얻었다.

이재민들이 도착한 이주 당시 마현리는 전쟁 전에 8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던 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으며, 인근에 집들이 있는 것으로 짐작했으나, 막상 트럭에서 내려진 주민들을 기다리는 곳은 군인들이 쳐놓은 60개의 덩그런 천막이 전부였다.

더구나 스무날이 지난갈 때 쯤엔 4.19혁명이 일어났고 강원도 도지사(울진군은 1963년도까지 행정구역이 강원도였음)도 바뀌었다. 한마디로 책임질 도백이 사라진 것. 사라진 것은 그 뿐만 아니었다. 그들과 관련한 서류마져 전부 증발하여 버렸다. 그러나 마현리에 버려지다시피 던져진 울진 사람들은 악착같이 일어났다.

그때 지원받은 양식도 중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이를 악물고 황무지를 논밭을 일구었다. 한 가마니에 닺 말이라는 엄청난 이자가 붙은 보리쌀을 빌려와 허기를 채웠다. 또한 귀한 볍씨를 사서 못자리를 해놓았다가 워낙 우거진 숲속이라 못자리를 한 곳을 찾지 못해 묵혀버린 적도 있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땅을 악착같이 개간했다. 비싼 이자로 돈을 꾸어 송아지를 샀다. 쇠로된 쟁기는 그들에게는 일종의 사치였다. 나무로 고레를 만들어 논밭을 일구었다. 일손이 바빠서 잔돌을 미쳐 골라내기도 전에 맨발로 지근지근 밟아 모내기를 했다.

▷역경을 넘고 넘어
낮선 곳에 와서 먹고 살기위해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에도 인근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 배가 고파 풀뿌리나 열매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가 들키는 날에는 나이 어린 군인들에게 뺨을 맞고 군화발에 집어차기도 했으나 그래도 이주민들은 먹고 살자니 통제구역을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마현리 마을 이장인 이상경 씨 형님도 산에서 지뢰가 터져 발목을 잃었으며, 이주민들은 먹을 것을 챙기기가 절실했다. 이러한 사정을 목격한 부대장이 쌀 두가마니를 주며 술을 빚어 군인들에게 팔아서 돈을 마련해 보라고 해 몰래 몰래 장병들에게 술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논밭을 개간할 중장비를 구입하기도 했다.

마현리 일대는 6.25 격전지에서 쇠로 된 장비로 깊이 팠더니 탄피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탄피 한 관(4kg)에 보리쌀 세 말, 여간한 수입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군인들이 엄격한 통제 등으로 내다 팔 수 없었다. 군인들은 와수리 장날 시장에도 5명이 1조가 되어 구호에 따라 움직이게 했다.

군인들은 지키는 검문소에서 샅샅이 뒤져 탄피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구타했다. 군인들이 남자 어르신들은 사타구니까지 샅샅이 뒤지는 바람에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아낙네들이 몰래 숨겨서 내다 팔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연도 비일비재하다. 남자들 대신 마현리 울진 아줌마들이 탄피를 팔아 돈을 마련했다. 아이가 있는 아낙은 보자기에 탄피를 말아 띠를 만들어 몸에 감고 탄피 위에 아기를 업고 검문소를 통과했다. 아이가 없는 아줌마들은 ‘빤스’나 ‘젖싸게’속에 탄피를 숨겨 검문을 피했다.

무게를 감안해서 적당량씩 반출을 했으나 한번은 욕심이 나서 그만 무게를 넘어버렸다. 하필 검문소 앞에서 다 낡아빠진 빤스 고무줄이 끊어져 버렸다. 자식같은 군인 앞에 탄피꾸르미와 함께 구멍 숭숭한 낡은 빤스가 철렁하고 떨어졌다.

군인들의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을을 통제하던 초소를 박살내버렸다고 한다. 그사건 이후로 군인들의 통제도 줄어들고 점차 서로를 이해하며 화해하는 계기 마련과 함께 오히려 군인들을 이용하는 요령까지 생겨나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특히 어른들은 농사일을 하러 갈 때는 예쁜 여고생 딸을 데려간다. 혼자 논에 가면서 낫은 30자루 챙겨 일터로 간다. 논둑에 여고생이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잠시 후면 여러 대 트럭에서 군인 30여 명이 내려 낫을 들고 풀을 벤다. 그러나 화해가 필요한 것은 군인과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마현리 2세들의 혹독한 고난사
지금 이장인 이상경씨는 "여기서 나는 마현리 2세대라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마현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진정한 마현리 1세대"라고 자부했다. 마현리에서 태어났다고 무조건 1세대가 아니라는 것.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날 기르시니”의 유교적 원칙에 따라 어머니 뱃속에서 울진을 떠나온 1960년생은 마현리 1세가 아니었다. 마현리 군용텐트에서 배태된 사람만 마현리 1세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상경 이장은 1960년생으로 ‘가장 먼저 마현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2세대들의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1세대들이 죽을 고생을 해서 일궈놓은 땅에 주인이란 사람들이 나타났다. 정부는 ‘특별조치법’을 재정해 원주인이란 사람들이 보증인 3명 이상 내세우면 소유권 등기를 해주었다.
이 때문에 마현1리 울진촌은 개간한 농지 70%를 잃었다. 2세대들은 그 땅을 주인으로부터 다시 구입하거나 임대하여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1세대의 피나는 노력이 2세대에게는 빚으로 넘겨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대들은 아는가!
지금 철원군 마현1리는 철원군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부자마을로 널리 알려져있다. 1천 평 당 설비비만 1억5천만원이 든다는 초 현대식 비닐하우스를 가구당 최소 3동 이상 보유하고 있다. 전국 파프리카 생산의 1/3이 철원에서 생산되며, 철원군에서 생산되는 양의 1/3이 마현리가 차지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면 반전을 넘어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나마 자동선별기를 갖춘 이장님댁 농업법인은 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지만, 개인 선별기로 포장하는 가정들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선별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땅만 있다고 부농이 쉽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엄청난 피땀이 땅을 적셔야 결실이 얻어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에는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조국 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사라호 태풍 때 울진 수재민 66세대는 1960년 4월7일 이땅에 입주하여 고달픈 천막 생활과 허기진 배를 주리어 피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6.25동란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정신의 빛나는 업적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조상들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여기에 조그마한 비를 세우노라"고 적혀있다.

담백한 울진식의 문장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이상경 이장이 청년회 회원일 때 마을 청년회에서 비를 세웠다고 한다. 외부에 비석 문구를 의뢰해서 잘 쓴 글들이 접수되었지만, 마현리 주민들은 이 비문(碑文)을 선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울진인이며 울진인의 자부심으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뿍 묻어 있었다. “즐거워도 아리랑, 슬프도 아리랑, 힘들고 어려워도 아리랑, 기대에 찬 내일도 아리랑,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하며 울진 아리랑! 이제 2018년 울진 아리랑을 그려보며...,

‘내사랑 울진’밴드 운영진 일동(밴드 리더 황승국)은 이주민 어르신들의 요청에 따라 3개월 동안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한편 이주 당시 364명 중 현재(2017년 11월말) 거주자는 100여 명으로 최고령자는 안정희(90) 할머니이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는 219세대에 356명이 거주하며, 65세 이상은 99명(28%)으로 나타났다.

울진/장부중 기자  bu-joung@hanmail.net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울진/장부중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임광원 울진군수가 마현1리 인솔자인 이상경(58)이장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울진군청 현관앞에서 고향을 찾아온 강원도 철원군 마현1리 주민 80여명과 임광원 울진군수가 함께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