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편집국장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書經)에는 천시자아민시, 천청자아민청(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하늘이 보는 것이 우리 백성 보는 것으로부터 보며, 하늘이 듣는 것이 우리 백성 듣는 것으로부터 듣는다’는 뜻으로 순리에 따라 세상을 살아야 함을 일컫는다.

인간이 자연을 위대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를 본받아 예(禮)를 만들어 질서를 유지케 하였고, 자연의 소리를 본받아 인간이 악(樂)을 만들어 화목하게 하였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연의 혜택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 이것을 두고 순리(順理)라 한다. 이와 상반된 역리(逆理)는 하늘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 거스르는 것이다.

지난 10월 이낙연 국무총리가 취임 후 141일 만에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이 총리는 참배 후 방명록에 "나라다운 나라로 사람 사는 세상, 이루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못난 이낙연"이라고 기록했다.

필자는 총리의 방명록 글을 보면서 ‘나라다운 나라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은 서경의 한 구절처럼 자연의 이치와 같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예를 갖추고 질서를 지키면서 화목하게 윤리에 벗어나지 않고 사는 세상이 아닐까 한다.

섬진강의 참게는 뒷다리의 힘이 억세 깊은 항아리 속에 갇혀도 기어올라 빠져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참게도 두 마리 이상을 넣어두면 탈출을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 마리가 올라가려고 하면 다른 참게들이 뒷다리를 잡기 때문에 다시 밑으로 떨어져 탈출을 못한다는 것이다. 참게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와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러한 형태를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남의 뒷다리 잡기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한 마리씩 천천히 나가면 될 것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는 참으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앞서지 않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도와준다면 내가 스스로 앞서지 않아도 앞서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한다. 갈등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칡나무의 갈과 등나무의 등이 합해 이루어진 갈등은 서로 뒤엉킨 모습을 이르는 것으로 일이 까다롭게 뒤얽히어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을 일컫는다.

삶의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늪을 늘 경계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어차피 찰나에 의탁하는 삶, 위험을 감수하는 저마다의 선택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한다.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는 것도 한바탕의 삶이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되는 일에 전부를 던지는 것도 한바탕의 삶이다. 그렇다고 서로 배타적인 삶도 아니다. 최후의 혹은 매 순간의 선택은 모두의 권리일 뿐이다. 다만, 그런 자유로운 선택은 정상적인 서식환경에서 허용된다.

지속적이거나 단절적이거나 그 나뉨을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면, 물질적 보상 없이는 도덕성을 기대하기 힘든 쪽과 물질적 보상 없이도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쪽이 우리 사회에 공존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형이상적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극한의 기아에 허덕이면서 물질의 유혹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불나방의 마지막조차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지 외부적인 악조건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집착이거나 초연이거나 선택에 의한 것일 때를 온전한 삶이라 하고, 강요받거나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할 때를 불완전한 삶이라 할 만한 이유다.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된 이후 정치의 요체가 민생과 도덕이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 비로소 윤리와 도덕이 생긴다. 먹고 사는 일이 불안정하더라도 변치않고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러나 정치란 물질적 토대없이 도덕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술년을 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나라를 보면서 갖게 되는 생각은 생존에 매달리는 사람이나 매혹적인 가치를 좇는 사람의 서식환경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소비심리가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 경제인구들은 궁여지책으로 상업 쪽에 쏠리고 그 공급 규모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으나 소비주체들의 경제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탓이다.

나라다운 나라 사람사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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