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이스라엘에 대해서 근거가 불분명한 친근감을 가져 왔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축구 시합을 하면 늘 이스라엘을 응원해 왔다. 그 수도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다. 6일 전쟁 등 이스라엘이 중동 여러 나라를 폭격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린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때려 눕힌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개신교를 믿으며 성경을 읽는 동안에 친숙해진 모양이다. 예루살렘도 그래서 성지로 입력되어 언젠가 생명이 아깝지 않을 나이가 되고, 하늘 나라가 가까워지면 순례 여행으로 한번 가 보리라 마음 먹고 있다. 아직은 하늘나라 보다 세상이 가깝게 느껴져 선뜻 순례 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여행길에서 폭탄테러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위험하다는 지역을 이웃집 드나들 듯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심이 대단해 보인다.

마침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 성탄절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육화(肉化)’한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33년의 짧은 삶을 십자가 위에서 마감한 절대자는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숨을 거두었다. 국가 보안법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레닌이나 마르크스를 읽을 때처럼 프리드리히 니체를 교회 눈치를 보며 읽었다. 짜라투스트라의 ‘신은 죽었다’는 울부짖음도 일부는 맞다. 다음 부분을 추가하면 된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옛날 야곱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고 해서 새 이름을 부여 받은 게 이스라엘이다.

세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정보기관 모사드의 영화 같은 활약상이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에 남다른 친근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유대교와 오늘날의 기독교가 같은 종교는 아니다. 어찌 되었건 예루살렘은 17억 기독교, 9억 이슬람, 1,900만 유대교의 성지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도시의 위상을 미국 대통령이 재조정해 버린 것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자기 나라 재외공관 위치를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파견국과 접수국간 협약이므로 제3자가 간섭할 일은 아니다. 다만 그 나라의 수도가 어디라고 정하는 것은 좀 성격이 다르다.

이 문제를 예민하게 받아들일 사람들은 많다. 그 도시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가장 격분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을 부산이나 평양 혹은 도쿄로 부르자는 것과 유사한 충격이 아닐까 싶다.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대한민국 민주화가 급선무일 시기에 그래도 눈길이 가는 국제적인 관심사는 중동 문제였다. 머리에 체크무늬나 흰 수건을 두르고 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사람이 자주 뉴스에 등장하였다. 팔레스타인을 이끄는 아라파트 의장이라는 인물이었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정도의 빈도로 자주 등장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그 사람이 오늘날 탈레반이나 IS 지도자 정도로 비쳐졌다. 그러다가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나란히 세 사람의 사진이 게재된 이후에 예루살렘 문제는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중동의 불씨 문제는 무관치 않다. 한 해 수만 명 규모의 성지 순례 여행객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고 각종 산업협력도 이스라엘과 적지 않다. 20013년 양국간 교역 현황은 23억 달러가 넘는 규모이고 수출이 15억 달러, 수입이 8억 달러 정도다. 포스코도 한 때 이스라엘 사무소가 있었고 현지에 근무한 바 있는 이스라엘 전문가가 지금 포항에 있는 어느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게 분할하여 존속시키는 이른 바 ‘코르푸스 세파라툼’ 즉 ‘분할 인정’ 또한 남북으로 양분된 우리 현실과 유사성이 높다.

잉글랜드는 비공식 국가로 ‘예루살렘’이라는 노래를 사용하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다. ‘나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의 검도 내 손에서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우리가 정녕 예루살렘을 이 땅에 지을 때까지. 잉글랜드의 푸르고 아름다운 땅 위에’. 자기네 나라에 있지도 않은 도시를 찬양하는 노래를 국가로 부르고 있는 나라도 특이하다. 하긴 오늘의 이스라엘 건국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나라가 영국인 것이 그런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11세기 이후 예루살렘을 둘러싼 십자군 전쟁과 칭기스칸의 몽고가 예루살렘을 손 안에 넣으려고 했던 13세기 역사는 영화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칭기스칸 손자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였던 어머니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1262년 4월 10일 훌라구는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동맹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참된 그리스교도의 신앙으로 몽골군이 사라센 국가를 철저하게 파괴하며 진격을 할 때 다른 한쪽의 바다를 지배하는 그대는 그 쪽으로 도망친 이교도들, 그대와 나의 공통된 적을 쓸어 담으시오’. 서양에 인간 사냥꾼으로 알려진 칭기스칸의 후예 몽골 군이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하여 이교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말살시키는 장면은 매우 드라마적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누가 물어 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기독교 유물이 묻혀 있을 몽골 유적 발굴 작업에 합류하는 것」을 꼽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 박애 정신이 예루살렘을 진정 평화의 도시로 만들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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