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아침산책] 물다짐윤혜주 수필가
   
성토(盛土)한 흙 위에 물을 뿌린다. 길게 이은 호스에서 무지갯빛 물줄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되매기 흙속으로 스며든다. 마른 종이 위에 살며시 내리는 보슬비처럼 흙이 내어준 자리에 물이 자리하여 자연스레 섞인다. 방금까지 푸석하게 들떠있던 땅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흙은 물을 배척하지 않고 물은 흙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롯이 서로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집을 지었다. 약한 지반을 다질만한 장비조차 들이지 못할 상황이었다. 시공업자는 약속한 완공날짜를 한참 미루고 물다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무른 땅에 물을 뿌려 흙을 적셨다 말리기를 반복하는 그 공법은 단순하지만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뜨악해 하는 우리를 설득했다. 푸석한 흙 사이가 물로 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바닥이 굳어져 지반의 침하를 막아주는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일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이틀 혹은 사흘 만에 나타나 발바닥으로 예민한 그만의 촉으로 조금씩 다져지는 지반의 강도를 점검하고는 돌아가곤 했다. 지루하고 고된 날이 계속되었다. 그의 발바닥 촉감이 허락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흘렸을까. 끝없이 반복되던 그 고된 물다짐의 시간은 마치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완성하는 우리네 삶의 한 단면 같기도 했다. 마침내 그 아린 시간들이 단단한 집의 기초가 되어 주춧돌을 괴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으면서 온전한 한 채의 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차를 만들 때는 아홉 번 덖고 아홉 번을 비빈다. 또 덖은 차는 바람에 말리고 다시 덖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야 맛과 향이 그윽해지고 빛깔 고운 차가 된다고 한다. 죽염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대나무 속에 천일염을 넣고 황토로 막아 소나무 장작으로 고온에 아홉 번을 구워야 건강에 좋은 죽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대나무와 소나무, 황토의 여러 성분과 천일염의 미네랄이 섞이는 그 오랜 시간은 한 채의 굳건한 집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물과 흙이 섞이는 값진 시간이기도 하다. 차를 덖는 일과 죽염 만드는 일이 모두 물다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에도 물다짐 같은 건축공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부부사이, 부모자식사이, 친구사이 같은 소중한 관계에서 준비 없이 너무 빨리 다가가려다 상처를 받기도 상대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일을 계획함에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요행을 바라거나 단번에 만족한 결과를 얻으려 서두르다 보면 균열이 생기거나 온전함도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세심함과 유연성,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하면서 신뢰와 믿음을 차곡차곡 쌓아 다져나가야 한다.

기다림으로 지내는 시간의 고독과 암담함이 어찌 고통이 되지 않겠는가. 또한 기다림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인고로 그 수동성 자체가 사람으로 하여금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그 공허하기도 암담하기도 한 시간이 두려워 체념하거나 포기해서는 결코 새해에 계획한 일들의 완성도를 높일 수 없다.
또한 욕망의 속성이란 시간이 지나면 그 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타오르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욕망이 생기면 전의 욕망은 사그라진다. 때로는 스스로 희망을 걸다가도 실망을 겪으면 계획한 일들이 느슨해지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긴장과 여유의 조화라는 물다짐 같은 공법이다. 부모자식 간에도 어른이라는 입장만 강요하고 아이들이 다가 오려할 때 거부한 적은 없었을까. 열린 마음으로 생긴 균열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끝없이 온기를 불어넣으며 진득이 기다려야 하리. 소리 없이 움직이고 소리 없이 다가가야 하리. 밀쳐내면 밀쳐내는 대로 무관심하면 무관심한 대로 기다리다보면 신뢰와 믿음이라는 다짐 위에 상대의 마음이 명주에 감물처럼 스며들어 다져지리라.

  다시 시작이다. 헌 해를 저 광막한 우주 속으로 떠나보내고 새해를 올해로 맞았다. 어찌할 수 없는 변화는 하늘의 섭리라 우리는 그저 맞이해야할 시간들과 맞닥뜨릴 뿐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 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더 바람대로 실현하기 위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새해는 어떻게 살 것인가.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 사랑하고, 발전하며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기쁜 생활을 원한다면 물다짐 같은 공법의 기초위에서 실행해보라. 분명 내일은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는 새날이 될 것이다.

대경일보   webmaster@dkilbo.com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경일보 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