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삼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환갑을 넘기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생존기간이 그만큼 짧았기 때문에 인생 이모작은 꿈을 꿀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의 결정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몇년 전부터 계속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혜민 스님의 에세이「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는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라고 말한다. 시간의 보복이란 뭔가 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그 때를 놓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시간의 보복을 잉태하는 길이 될 것임을 충고한다. 젊은 시기의 결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중국 동진, 송나라 때의 시인, 도연명 (陶淵明)의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원기 왕성한 나이는 거듭 오지 않고 하루에는 두 번 새벽이 없다. 때에 이르러 마땅히 힘쓰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남보다 먼저 출세할 뜻을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청운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대부분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이가 들면 그때서야 젊은 시절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가 뼈를 깎는 고통으로 남는다.

하지만 지금은 수명이 백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생존기간이 늘어나다 보니 젊은 시기의 잘못된 결정으로 놓친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살다보면 사람이나 기업이나 변곡점에 설 때가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급상승과 급하강이 갈리는 변화의 시작 순간이 다가온다. 이때 한순간의 결심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는 것이다. 경쟁의 사회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실수를 경험 삼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당(唐)의 문장가 왕발(王勃)이 쓴 등왕각서(騰王閣序)에는 동우이서, 상유비만(東隅已逝, 桑楡非晩)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소년기는 이미 지났지만 만년이라도 늦지 않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도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분들이나 만년에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머리가 희끗하고 눈은 어두워져 글씨가 가물가물 한데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이루고자 하는 열정 하나만은 젊은이들 못지않다. 연륜의 숫자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일에 의욕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의욕과 실천력이 실질적인 나이를 의미한다고 본다. 비록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들도 무수히 많다.

나이 들어서 하는 일의 보람과 즐거움은 그것을 느껴 보지 않고서는 말 할 수 없다. 지는 해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만년의 나이지만 무엇을 하고자 하는 데에는 늦은 법이란 없다. 오히려 뒤따라 올 세대를 위한 등불이 되어 희망의 싹을 심어 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고 하지 않았던가. 나이가 들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바로 내 자식과 손자의 거울이 된다.

지난 토요일 포항시 대잠홀에 초청된 작가 박범신, 영원한 청년작가라는 수식이 붙어다니는 그는 '자기 변혁에 창조적 자아에 대한 욕망이 있느냐?의 여부 가 젊음을 말한다고 했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란 고사가 있듯이 끊임없이 노력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나이가 무슨 대수이랴. 누구나 하면 된다. 단지 생각에만 그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게 문제일 뿐이다. 젊든, 나이가 들든 간에 무슨 일이든 너무 오랫동안 미루지 말라는 것. 그래야 시간의 보복을 당하지 않고, 젊은 시절 한 번의 실수 정도는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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