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런 것을 보면 왠지 낯이 간지러워진다. 하지만 촌스러운 것에는 꾸밈이 없다. 간지러운 낯에는 어느 새 웃음이 머금어진다. 촌스러움에는 무언가 강렬한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다!’, ‘조국 통일!’ 2002년 가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북한 응원단이 남한의 관중들과 어울려 외쳤던 말이다. 방송에서 본 그 목소리 그 모습에는 촌스러운 구석이 물씬 풍겼다. 이런 촌스러움에서 우리 모두는 무언가 강렬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북한 응원단 방문이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는 통일에 당장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운동선수끼리, 같은 피붙이끼리 또는 특별한 전문가끼리만 느낄 수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일반 시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과거 그 어떤 행사보다도 뜻이 깊었다고 본다. 막연한 동질성이 구체적 동질성으로 확인된 계기가 된 것이다.

북한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한다. 지난 9일 판문점에서 고위급 회담을 연 남북은 공동보도문을 통해 북측은 평창올림픽에 고위급 대표단과 함께 민족 올림픽위원회 대표단, 선수단,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시범단, 기자단을 파견하기로 하고, 남측은 필요한 편의를 보장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큰 틀에서 의견을 좁힌 만큼 이제는 실무선에서 세부사항을 조율하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여기서 반성해볼 것이 있다. 흔히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고 한다.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 그 자체만을 본다면 그 말을 타당하다. 하지만 국가 대항으로 벌어지는 스포츠 대회의 참가나 개최는 정치성을 띌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근대 스포츠의 역사가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아시안 게임 참가나 응원단 파견은 다분히 정치적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는 모든 인류의 공통 언어이기 때문에, 그것만큼 이해와 조화를 거두기 쉬운 것도 없다. 우리처럼 외압에 의해 분단된 민족에게는 더욱 그 의미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같이 할 수 있는 기회를 가급적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해진다. 더구나 이번처럼 같은 강토에서 선수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이 호응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없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북한의 이번 참가는 그 의의가 크다.

그런데 북한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아시안 게임 개최 몇 달 전만 해도 그들의 참가 여부는 오리무중이었다. 1986년도 아시안 게임이나 1988년도 올림픽 게임에 북한은 참석하지 않았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는 참가했다.

이번에도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았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북한참가가 이뤄졌다. 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해온 문재인 대통령의 뚝심이 큰 결실을 이뤄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지난 1일 신년사에서 서울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재인 정부의 발걸음에 발을 맞추어 늘 함께 하겠다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모처럼 찾아온 기회, 정말 잘 살려 나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스포츠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남북한의 정치 환경일 것이다. 북한의 아시안 게임 참가는 햇볕(sun shine)으로 상징되는 대북 포용 정책이 결실을 맺은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평창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등 우리 앞에 놓인 남북 간의 정치적 현안은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을 비롯한 모든 국가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가 북한의 대회 참가와 ‘미녀 응원단’의 상긋한 미소가 같은 민족으로서 더 한층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런 만남이 통일의 당위성이나 실현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북한을 대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선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반성을 해보는 것은 남북한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제대로 잡아 일관성 있게 추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을 논의하는 현실을 보면서 현상이 있게 한 원인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