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어떤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윤리와 정치, 도덕, 나라의 품격 같은 말들이다. 본질상 양립하기 어려운 것을 엮으려나 해서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국익을 앞세운 이합집산 활동의 가당치도 않은 견강부회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 것인가. 대의 민주주의 근간이라 할 정당정치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그 당이 표방하는 이념과 국가적 목표, 비전이 명확해야 한다. 우리 나라의 정당에 그것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 이유는 정치, 종교계, 학계, 문화계에 원로나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느 순간 그런 존재들이 떠나간 것인지, 아니면 후배들이 그 정통성에 시비를 걸어 떼밀어 보냈는지 모르겠으나 각 분야에서 어른들을 꼽아 보기가 만만치 않다. 중앙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향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통과 이단이 혼합되어 가는 세상에 전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전조는 사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모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문학과 이공계의 결합이니 통섭형 인재니 하면서 인간의 다기능성을 조직이나 집단에서 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본다. 요리도 퓨전 스타일, 자동차도 연료전지와 기름을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카, 기술도 융ㆍ복합의 시대 등. 온갖 종류의 알코올을 섞어 마시는 폭탄주가 밤을 지배하면서부터 저급한 ‘칵테일’ 문화가 자리잡게 되지 않았을까. 꿋꿋이 한 우물만 파던 외길 인생들이 푸대접을 받게 되고 심지어 밥 벌어 먹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장인 정신이란 잊혀진 사은유가 되고 말았다. 얼치기 딜레탕트들이 판치는 세상에 전문가의 자리는 없다.

정치도 자신의 소신을 관철해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색깔도 없고 뿌리도 없다. 그 때 그 때 유권자 귀를 간질이는 공약미 삼백 석을 갖다 바치면 그 뿐이다. 칵테일 술 이름에다 오늘날 정치를 빗대어 보자. 흑돼지 피를 적당히 섞어서 ‘캄파리 온더 락스’나 ‘블러디 메리’라 들이밀고, 몽블랑 잉크를 풀어 ‘블랙 러시안’이라 강매를 하고 있는 짝이라고나 할까. 양고기를 진열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고사성어도 떠오른다. 최근 정치인들 행보를 보면 섞어도 너무 섞고, 썩어도 너무 썩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 땅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도무지 잘 모르겠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과 평균적 대화, 일상의 기사와 정보를 접하고서도 알 수 없는 대한민국 정치 드라마다. 양당 정치인지 다수당 정치인지, 진보와 보수의 이념, 중도 세력의 존재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설명할 정도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모호하다 보니 경제 정책도 오락가락한다. 정책을 참고로 해서 어느 진로를 선택하는 게 유리할 지, 주식이나 부동산은 팔아야 할 지 사야 할 지, 기업 설비투자는 어떻게 할 지, 어느 학파 주장이나 이론을 살펴봐야 잘 살아갈 수 있을 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럴 것 같으면 공부는 뭐 하러 했느냐’는 핀잔을 듣고마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정치나 경제 전문가라는 주장은 유권자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당신이 그러고 있는데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라는 싸늘한 반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문화, 예술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지막지한 힘의 논리, 천박한 장삿꾼 계산에 우아하고 격조 높은 문화 예술 혼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된 지 오래다.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도대체 어느 시대 어느 집단에 통용되던 말인가. 뭔가가 넘어오려는 걸 겨우 참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라는 소설은 몇 차례 분서갱유를 견디며 꽤 오래 나의 조촐한 서가에 진열되어 있었다. 에곤 쉴레의 불안한 표정과 제목이 주는 통쾌함에 끌려 현실 사회에서 견디기 어려운 거부감이 들 때 가끔 집어 드는 책이다. 또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답답한 마음에 활명수 같은 책이다. 1864년 상인 출신 국회의원 아들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학, 베를린대학 등 독일 4개 대학에서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공부한 저자의 정치적 유언장이다. "어리석고 비열해 보이는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열정적 소명도 없이 그저 잘 먹고 살기 위해 정치판을 이용하는 ‘가짜’들은 베버를 빌리자면 천박한 기생충이나 하이에나와 다를 바 없다.

부와 마찬가지로 권력 또한 정의롭고 선량한 목적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왜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지 물음에 울림이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명예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원한 풀이는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다. 남은 삶을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허울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사기행각도 이제 질렸다. 밀실 거래만으로 자리를 구매한 무자격자의 무능과 저질 언행이 시민들의 가슴에 얼마나 심각한 상처를 안겨 주는지.

이 땅의 차세대 정치 신인들은 어디서 무얼 보고 정치를 배워야 할 지 안타깝다. 권모술수나 ‘아니면 말고’식 마키아벨리즘 계통 텍스트만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 정치 환경이 아니기를 바란다. 진정 시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는 ‘뜨겁고도 간절한 애통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분들의 참신한 정치 드라마를 맘껏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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