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책을 한 번쯤 내본 분들은 공감하리라 생각됩니다. 책의 출간을 기다리는 저자의 심정은 약속시간에 늦으면서도 연락조차 없는 짝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심정을 넘어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에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억지로 쥐어짜다시피 쓴 책도 있을 것이고 따뜻한 봄날 즐거운 산책과도 같은 기분으로 쓴 책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쓴 책에 대한 애정이야 우열은 없을 것입니다.‘열 손가락 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쓰고 싶습니다.

책을 발간하다 보면 출간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행 산문집을 출간할 때 일입니다. 기한을 넘기나 보다, 아니 곧 나오겠지 등등 별 생각에 설레고 있을 때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저런 사무적 대화의 마지막에“요즘 책이 워낙 안 팔려서 1000부만 찍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자,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붕이 왔습니다. 10년 전 첫 책을 낼 때만 해도 초판이 3,000부 였다고 했더니,‘웬 구석기시대 얘기'를 하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의 책도 2,000부 정도 나간다니까요" 라는 말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인기 작가의 수요가 확 줄었다는데 나 같은 미생이야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독자 수가 몇 년 만에 반 토막 정도가 아니라 반 토막의 반 토막도 못되게 줄어든 이유를 말입니다. 골똘히 생각할 것도 없이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꼽은 범인으로 떠올렸습니다. 스마트폰의 급속과 많고 많은 기능으로 지하철 안에서 책은커녕 신문을 보는 이도 보기 힘들고 심지어 무가지와 지하철 광고도 거의 없어지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한 번은 지인들 모임에서 오늘날 책을 읽지 않는 풍토와 그 원흉인 스마트폰을 성토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말했습니다. 휴대전화는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 근본원인은 집값, 전세비용, 생활패턴 변화로 주요 문화소비층인 20~30대가 문화에 돈을 쓸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경제적으로 쪼들리기에 가장 저렴하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애용하는 것뿐이지 그것이 책을 안 읽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간단하고 명쾌한 논리에 충분히 수긍하였습니다.

독서시장이 이 지경이 된 책임을 부동산과 문화 정책 입안자에게 물어야 한다고 그날 밤늦게까지 열변을 토한 기억이 숙취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상갓집에서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관심이 오로지 책을 읽지 않는 원인에 쏠려 있기에 마침 잘됐다 하는 생각에 여쭈었더니 원로 한 분이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대학에 가기 힘들어 고등학교만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사실 문화의 주요 소비자였다. 지적, 문화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곳이 책밖에 없어 이들이 독서에 몰두하였고 그에 따라 교양서가 팔리게 되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요즘 대학 정원이 늘다 보니 너도나도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대학생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느냐는 반문으로 끝맺음을 하셨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찾아 생각하고 탐문했더니 스마트폰, 부동산 정책의 실패, 대학입시 정책과 대학생들의 성향까지 돌고 돌아온 것이지요. 모두 일리가 있지만 전폭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독자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인문학 전공자들이 대중과 호흡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시도하지 않은 것이 보다 현실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거대한 현실의 실체가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과 인문학에 관심이 없고 민주, 정의 등 거대담론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생존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 곧 생활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 또는 직업이 없으면 변하지 아니하고 바르고 떳떳한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맹자의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요즈음입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자 미래의 고귀한 투자인 책과 인문학에 관심이 줄어든 직접적 원인이야말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우리 기성세대에게 있다는 생각에 추운 날씨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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